카페에서 물건을 훔쳐가지 않는 나라 / 박권일

한겨레 2022. 8. 1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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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끝내고 질문을 받았다 . "선생님께서는 한국이 경제 수준에 비해 신뢰가 낮은 사회라고 하셨는데요 , 제가 얼마 전 읽은 책에서는 카페에 노트북 컴퓨터를 놔둬도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 건 한국이 사회적 신뢰가 높은 선진국이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 뭐가 맞는 이야기인지 헷갈리네요 ."

실제로 많은 외국인은 한국 사람들이 카페 같은 공공장소에서 아무렇지 않게 휴대전화나 가방을 놓고 다니는 걸 보고 자기 나라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놀라워한다 . 물건을 그렇게 뒀다간 순식간에 사라질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 확실히 이것은 한국 시민들의 상호 신뢰가 굳건하다는 증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 나는 곧바로 질문에 답하지 않고 객석을 향해 되물었다 . "다른 분들께선 어떻게 보세요 . 카페에서 물건을 아무도 안 훔쳐가는 게 사회적 신뢰가 높은 증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잠시 어색한 웃음과 침묵이 흐르다 한 분이 나지막이 말씀하신다 . "시시티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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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불신은 '공정 빌런'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도 설명해준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에서 권민우 변호사는 동료 변호사가 공채 아닌 방식으로 부정취업했다며 끝없이 물고 늘어지면서도 로펌 오너의 세습에는 입도 벙끗하지 못하는 선택적 공정관을 보인다. 이는 개인의 비루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저신뢰 사회의 구조적 특징이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 이엔에이 제공

박권일 | 사회비평가·<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강의를 끝내고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께서는 한국이 경제 수준에 비해 신뢰가 낮은 사회라고 하셨는데요, 제가 얼마 전 읽은 책에서는 카페에 노트북 컴퓨터를 놔둬도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 건 한국이 사회적 신뢰가 높은 선진국이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뭐가 맞는 이야기인지 헷갈리네요.”

실제로 많은 외국인은 한국 사람들이 카페 같은 공공장소에서 아무렇지 않게 휴대전화나 가방을 놓고 다니는 걸 보고 자기 나라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놀라워한다. 물건을 그렇게 뒀다간 순식간에 사라질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것은 한국 시민들의 상호 신뢰가 굳건하다는 증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곧바로 질문에 답하지 않고 객석을 향해 되물었다. “다른 분들께선 어떻게 보세요. 카페에서 물건을 아무도 안 훔쳐가는 게 사회적 신뢰가 높은 증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잠시 어색한 웃음과 침묵이 흐르다 한 분이 나지막이 말씀하신다. “시시티브이….”

그렇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도시 전역에 촘촘하게 깔린 ‘눈’은 경범죄를 일정하게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다만 폐회로카메라를 카페 도난이 없는 유일한 이유로 꼽긴 어려워 보인다. 한국처럼 카페에 카메라가 많음에도 절도가 종종 발생하는 나라도 있고, 카메라 설치가 강력범죄를 포함한 전체 범죄율을 줄이지 못한다는 연구도 적지 않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한국의 카페에서 도난이 잘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하나만 지목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카페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게 높은 사회적 신뢰 때문은 아니라는 점이다. 2021년 레가툼 번영지수에서 한국의 사회자본은 167개국 중 147위였다. 한국은 ‘제도에 대한 신뢰’, ‘개인 간 신뢰’ 등 주요 영역에서 최하위권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사회자본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가운데 38위로, 매년 ‘붙박이 꼴찌’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한국인의 ‘사회적 고립도’는 34.1%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사회적 고립이란 질병 등 위기 상황에 부닥쳤을 때 도와줄 사람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요컨대 한국인 3명 중 1명이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유별나게 카페 도난이 드물다는 사실은 그것대로 흥미로운 현상이다. 하지만 정말 특이하고 중요한 사실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라는 이 나라의 시민들이 드라마 <오징어 게임> 참가자처럼 불신에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것이 한국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우선 한국인들은 남이 하는 말은 잘 믿지 않는다. 잘 모르는 누군가가 친절하게 대해준다는 얘길 들으면 “사기꾼일 가능성이 크니 조심하라”고 충고한다. 한국인들 대다수는 부자가 되길 갈망하지만 부자는 비도덕적이라고도 생각한다. 이는 일종의 경험칙이기도 한데, 실제 한국의 재벌은 불법·탈법·투기의 제왕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소방관 정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가기구와 공직자를 불신한다. 그중에 국회, 검찰, 언론은 최악이어서 난생처음 만난 사람보다 못 믿는다. 회사나 상사의 상벌·평가시스템도 불신한다. 이렇다 보니 한국인은 자질과 능력, 업무성과에 따라 보상 격차를 크게 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뜬금없게도 ‘근무 태도’, 그러니까 야근을 많이 하는 등의 근면성실을 차등 보상의 최우선 기준으로 놓는다(‘2018 한국 사회 공정성 인식 조사’). 왜일까? 나의 매출 기여는 모호할 수 있지만 내 야근기록은 명확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불신은 ‘공정 빌런’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도 설명해준다. 저신뢰 사회일수록 개인에 대한 총체적이고 다면적인 평가가 어렵기 때문에 형식적이고 정량적인 평가에 집착하게 된다.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등장하는 권민우 변호사가 전형적인 예다. 그는 동료 변호사 우영우가 공채 아닌 방식으로 부정취업했다며 끝없이 물고 늘어지면서도 로펌 오너의 세습에는 입도 벙끗하지 못하는 선택적 공정관을 보인다. 이는 권민우라는 개인의 비루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저신뢰 사회의 구조적 특징이다. 낮은 사회적 신뢰는 약자의 연대를 철저히 파괴하는 반면, 이권으로 뭉친 강자의 연대를 위협하지 못한다. 공동체의 통합뿐만 아니라 더 공평한 사회를 위해서, 사회적 신뢰는 지금보다 더 높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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