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다, 미얀마도 홍콩도..진부화라는 폭력 [서경식 칼럼]

한겨레 2022. 8. 1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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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칼럼]미얀마 군정이 지난달 23일 아웅산 수치가 이끌었던 국민민주연맹(NLD) 소속 전 국회의원과 민주화운동 활동가 2명을 포함한 정치범 4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얼마 전까지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그토록 열심히 보도했던 미디어들은 미미한 관심밖에 보이지 않는다. 즉, 이미 '진부화'한 것이다. 벨라루스나 홍콩의 민주화운동도 급속히 진부화됐다.

서경식 | 도쿄경제대 명예교수

일본에서는 가혹한 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재난도 진정될 기미가 없다. 나는 지난 5일 나가사키시를 찾아가 일본 26성인(聖人)기념관 회의실에서 강연했다. 그곳에서 열린 ‘평화학습 포럼’의 기획으로, 강연 제목은 ‘지금 요구되는 상상력―전쟁과 미술(繪畵)’이라는 것이다. 1945년의 원폭 투하로부터 올해까지 77년, 나가사키시와 그 주변에서는 예년처럼 관련 행사가 열려 매스미디어도 특집으로 많이 다뤘다. “망각에 항거한다”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그래도 내 뇌리에는 집요하게 ‘전쟁의 진부화(陳腐化)’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전쟁이 진부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쟁은 인류 역사와 함께했고, 조금도 진부해지지 않았다. 전쟁의 기억이 진부해지고, 전쟁을 둘러싼 이야기가 좋든 싫든 진부해진다는 의미다. 서둘러 덧붙여 두자면, 나는 이런 진부화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망각에 항거하는” 싸움의 형세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지 반년, 그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어떤가. 전쟁을 둘러싼 이야기는 어쩐지 ‘차분해져’ 있지 않은가? 어딘가에 ‘싫증’난 듯한 감정이 배어 있는 것을 느낀 적도 있다.

전쟁이든 대재난이든 처음에는 분노, 비애, 동정이라는 감정이 넘쳐난다. 그러나 기껏 몇개월만 지나면 그런 감정에 호소하는 보도나 언설은 형식적으로는 지지를 받지만 급속하게 ‘진부화’해 간다. ‘기억하자’는 호소는 필요하고 올바르다. 하지만 그것이 많은 인간에게 유효할지는 의문이다. ‘원폭’도 그렇고, ‘홀로코스트’도 그렇고, 코로나 팬데믹도 그렇고. 우크라이나나 벨라루스는 ‘지옥’이라 일컬어지는 독일-소련 전쟁(1941~1945)의 전장이 됐다. 그런데 같은 장소에서 같은 전쟁행위, 잔혹행위가 반복되고 있다. 거기에서 외치는 슬로건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저작 제목 그대로 모두 “세컨드핸드”(중고품)다. 더욱이 현대는 그 잔혹성을 설명하는 ‘이념’ 자체가 사라진 시대다.

이것은 인간성의 본질적인 한계에 관한 문제일까. 인간은 현실의 가혹함이 어느 한계선을 넘으면 그것을 직시하거나 기억할 수 없는 존재인가. 그 한계선의 범위는 통상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좁은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대중’이나 ‘젊은 사람’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신기한 말투를 궁리하는, 그야말로 진부한 대안 따위가 아니라 ‘상상력’이나 ‘공감력’이라는 인간 본래의 잠재능력을 옹호하고, 키우고, 더 깊이 고찰하고, 끈기있게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강연을 위해 나가사키로 떠나기 직전에 미얀마의 사형집행에 관한 보도가 있었다. 미얀마 군정이 지난달 23일 아웅산 수치가 이끌었던 국민민주연맹(NLD) 소속 전 국회의원과 민주화운동 활동가 2명을 포함한 정치범 4명의 사형을 집행했다는 것이다. 솔직하게 고백하면, 이 소식은 나를 꽤 동요시켰다. 사형 자체가 인도에 반하는 잔혹형인 것은 물론이지만, 그것이 전세계의 중인환시리에 태연하게 강행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을 그토록 열심히 보도했던 미디어들도 이에 대해서는 (적어도 일본에서 보고 있는 한) 미미한 관심밖에 보이지 않는다. 즉, 이미 ‘진부화’한 것이다. 벨라루스나 홍콩의 민주화운동도 급속히 진부화됐다.

그 보도는 내 심리를 급속히 반세기 전으로 되돌렸다. 그 무렵 나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고생하고 있었다. 병인에는 나 자신의 섭생이 좋지 않은 것은 제쳐놓고라도 짚이는 사정이 있었다. 당시 한국에 모국 유학 중이던 내 형 둘이 정치범으로 체포, 투옥돼 그중 하나(서승)가 군사재판에서 한때 ‘사형’까지 선고받았다.(나중에 ‘무기징역’으로 확정, 또 다른 형(서준식)은 ‘징역 7년’) 나는 일본에 있었기에 그저 정신을 마모시키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마음이 들떠 숙면을 할 수 없는 밤이 이어졌다. 어두운 방에 드러누워 “잠을 자야지” 하고 자신을 타일렀으나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만 계속 귀에 들렸다. 형들은 지금 어떤 일을 당하고 있을까,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대답 없는 그런 질문을 끝없이 되풀이했다. 내 마음을 한층 더 소모시킨 것은 그런 상상 세계와 내 주변에서 전개되는 일본 사회의 ‘일상생활’ 간의 갭이었다. 지인들은 태평스레 내게 “장차 어떻게 할 거야?” “취직은?” “결혼은?” 등을 물었다. 내게는 그런 ‘일상생활’이 허구이고, 어두운 상상 속의 감옥이나 형장이야말로 진실이었다.

보도(<뉴스위크> 일본판 7월25일)에 따르면, 지금 미얀마에는 117명의 사형확정수가 있고, 그 가족들은 정부로부터 연락이 올까 두려워하고 있다고 한다. 연락이 오면 그것이 최후의 이별이 된다며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기분에 관해서도 기억이 있다. 유신독재 시대인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고인 8명이 대법원 판결 18시간 뒤에 처형당했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혐오감과 함께 어떤 무참한 일이라도, 어떤 부조리한 일이라도 이렇게 실제로 일어난다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때의 무참했던 기분이 반세기 뒤인 지금 또렷하게 되살아난다. 그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세계 각지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반세기 전의 그 내가 진실이고, 그 뒤 어떻게든 평화롭게 살아온 나는 허구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든다. 전세계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병들고, 고통받고 있을 때 진실은 그쪽에 있다. 내가 있는 곳은 허구 쪽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진부화’의 폭력에 계속 저항하는 것밖에 없다.

번역 한승동(독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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