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훈동 '400년 회화나무', 그 한 그루 그대로 숲이 되다

서울앤 입력 2022. 8. 11. 17:33 수정 2022. 8. 1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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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종로구의 숲과 오래된 나무를 돌아보다

[서울&] [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썬비호텔 뒤편 빌딩에 에워싸인 거대한 회화나무.

빌딩숲 속 옴팡진 응달서 자라는 나무

햇볕도 빌딩 사이 간신히 드는 곳에서

굵은 줄기와 기괴하게 꺾인 모습으로

역사 얘기 주렁주렁, 숲처럼 거대하다

숲은 숨구멍이다. 도심의 숲은 폭염의 열기에 찌든 도심에 신선한 숨을 불어넣는다. 그 숲에 사람이 머물며 숲을 읽는다. 숲에 남아 있는 역사를 읽고 숲을 거닐었다. 종로구 도심의 작은 숲 몇 곳을 그렇게 다녔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는 숲과 같다.

관훈동에서 빌딩에 에워싸인 거대한 회화나무를 보다

관훈동 썬비호텔 뒤, 빌딩으로 둘러싸인 곳에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다. 나무 앞 안내판에는 수령이 400년쯤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라고 적혀 있다. 보호수 안내판이 없는 것으로 봐서 종로구에서 관리하는 나무는 아닌 듯했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그 부근에 구에서 관리하는 나무는 없다고 알려주었다. 누군가 세워놓은 안내판에 나무와 나무가 있는 터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보호수로 지정돼 관리받거나 다른 명목으로 공인된 나무는 아니지만, 한눈에 봐도 평범하지 않은 모습이다. 굵은 줄기며 기괴하게 꺾인 모습으로 퍼진 가지만 봐도 100~200년은 넘어 보였다. 그 나무가 마음에 남았던 건 높은 빌딩들이 나무를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딩숲 가운데 옴팡진 응달에서 자라는 나무는 처진 가지를 몇 개의 기둥에 의지하고 있었다. 햇볕도 빌딩 사이로 간신히 든다. 창덕궁 돈화문으로 들어서면 양쪽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회화나무 고목이 몇 그루 있다. 문화재청은 창덕궁 회화나무들의 수령을 300~400년으로 추정한다. 관훈동 썬비호텔 뒤편 회화나무는 창덕궁 회화나무들보다 작지만 제법 커서 견줄 만하다.

계사 마당을 가득 메운 연꽃. 연꽃 뒤로 백송과 회화나무 고목이 보인다.

썬비호텔 뒤 회화나무 안내판에 이곳이 이율곡 선생 집터라는 문구가 있다. 공식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전에는 썬비호텔 옆 백상빌딩 앞 화단에 이율곡 선생이 살던 집터를 알리는 푯돌이 있었다. 그 푯돌과 회화나무의 거리가 50m 정도였으니, 회화나무가 있는 곳이 이율곡 선생 집터라는 이야기의 신빙성을 높이기는 했다. 하지만 언젠가 이율곡 선생 집터를 알리는 푯돌이 사라졌다. 수년이 지나고 푯돌이 인사동 승동교회로 옮겨진 사실을 확인했다.

종로구 자료에 따르면 인사동이라는 동명은 1914년 관인방의 ‘인’과 대사동의 ‘사’를 합쳐 만들었다. 대사동은 탑사동이라고도 불렀다. 원각사 터에 있는 석탑이 그 유래였다. 이후 절골, 사동이라고도 불렀다. 이율곡 선생 집터를 알리는 푯돌에도 ‘선생이 살던 절골 집터’라는 문구가 있다. 절골(사동)은 지금의 인사동과 관훈동 사이에 있던 마을이라고 한다. 현재 이율곡 선생 집터를 알리는 푯돌은 인사동 승동교회에 있고, 전에 푯돌이 있던 백상빌딩 앞 화단은 관훈동이다. 회화나무는 보통 궁궐, 공을 세우고 은퇴한 관료나 사대부, 대학자 등의 집에 심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썬비호텔 뒤 회화나무가 있는 곳은 누가 살던 곳이었을까?

조계사 부근 숲에서 만난 역사 이야기

궁금증만 안겨준 회화나무를 뒤로하고 조계사로 가는 길, 센터마크호텔 앞 길모퉁이에서 죽동궁 터를 알리는 안내판을 보았다. 죽동궁은 순조 임금의 장녀 명온공주와 그 남편이 살던 곳이란다. 그 후에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이 살면서 김옥균, 홍영식 등 개화파 인물들과 교류했다고 한다. 조계사 옆 우정총국 터는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의 주요 무대였다. 조계사 마당에 있는 회화나무 고목은 그날 벌어진 일들을 보았을 것이다.

조계사 초입 마당에 연꽃이 가득하다. 연꽃 뒤로 천연기념물 백송이 보인다. 회화나무 고목은 절집 용마루보다 높게 자라 우뚝 섰다. 회화나무 줄기를 배경으로 환하게 피어난 연꽃 한 송이가 눈에 띄었다. 연꽃 사이 길로 걸었다. 회화나무를 지나쳐 절을 나와 절 서쪽, 율곡로4길에 있는 수송공원의 작은 숲을 찾아갔다.

숲속에는 사람보다 푯돌이 많았다. 신흥대학 터, 중동학교 옛터, 숙명여학교 옛터,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를 알리는 푯돌과 독립운동가 이종일의 상도 있다. 이 작은 숲과 그 주변에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한 페이지가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서간도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던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대학이 1949년 정식 대학으로 문을 연 자리를 알리는 푯돌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신흥대학은 1955년 회기동으로 이전했고, 1960년 경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중동학교 옛터라고 새겨진 비석과 숙명여학교 옛터라고 새겨진 비석도 있다. 숙명여학교는 1906년부터 1980년까지 숲 바로 옆 수송동 80에 있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이종일의 상도 이 숲에 있다. 이종일은 천도교인으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으며 1919년 3·1 만세운동 때 체포돼 옥살이한 인물이다. 그는 몸담았던 보성사에서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기도 했다. 보성사도 이 숲 부근에 있었다.

조계사 옆 작은 숲에 있는 목은선생영당.

역사의 격동기를 품은 작은 숲에서 쉬고 걸었다. 오가는 사람 드문 숲은 역사를 품고 초록으로 빛난다. 숲을 나서는 길에 목은선생영당을 보았다. 숲에 싸인 작은 한옥, 목은 이색의 초상화가 있는 곳이다. 이색은 고려 말기 사람으로 원나라 국자감에서 공부하고 한림원 벼슬도 지낸 인물이다. 국운이 기우는 고려를 지키지 못했지만, 그는 끝까지 고려의 충신으로 남았다.

백운동천의 숲과 나무

목은선생영당을 뒤로하고 숲을 나와 케이티(KT) 광화문지사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인왕산과 백악산(북악산)이 만나는 청운동에 있는 옛 숲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이다. 시내버스를 타고 경기상고 정류장에 내려서 자하문터널 쪽으로 걸었다.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152,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건물 앞을 지나 숲으로 들어간다. 자하문터널 위 산기슭 숲이다. 숲 입구부터 거미줄이 보인다. 풀들이 억세게 자랐다. 썩은 나뭇가지가 나뒹구는 숲은 어두컴컴했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숲길이다. 그 숲속 바위 절벽에 백운동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이 바로 조선시대 한양에서 경치 좋기로 소문난 5곳 중 한 곳인 백운동천이었다.

백운동천 각자바위

백운동천의 ‘백운’은 흰 구름이다. 계곡 푸른 산천 위에 흰 구름 떠 있는 풍경을 그려본다. 조선시대 사람 김수온, 강희맹, 김종직 등은 이곳을 찾아 시를 남겼다고 하고, 겸재 정선은 그림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옛 풍경은 다 사라지고 바위에 새겨진 글자만 남아 옛날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 숲에서 옛 백운동 계곡의 아름다운 경치를 상상할 뿐이다. 백운동천 각자가 있는 숲을 나와 경기상고 쪽으로 걷는다. 200m 정도 되는 거리이니 이곳 또한 백운동천의 한 자락이었을 것이다. 경기상고에는 조선시대 청송당 터가 있다. 청송당은 조선시대 사람 성수침이 관직에서 물러나 살던 곳이다. 성수침은 조선 중기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좌절되고 그와 관련한 인물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당하는 정국을 보면서 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그곳이 바로 청송당이었다. 겸재 정선은 청송당과 그 주변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산기슭 빽빽한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작은 집 한 채. 청송당은 솔바람 소리 들리는 집이란 뜻이란다.

경기상고 본관 건물 앞에 있는 소나무(반송) 군락.

경기상고 본관 앞에 100년쯤 된 소나무(반송)가 군락을 이루었다. 그 숲을 보는 순간 겸재 정선의 그림 <청송당>에 나오는 소나무숲이 떠올랐다. 본관 건물 뒤로 발길을 옮긴다. 뒷마당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밤나무길이라고 적힌 곳이 나온다. 계단을 올라 숲으로 들어간다. 숲이 끝날 무렵 청송당 터를 알리는 푯돌을 보았다. 푯돌 뒤편 바위에 ‘청송당 유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이 조광조의 제자이자 학자 성수침이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했던 백운동천 깊은 숲 청송당 터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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