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땀 한 땀 손으로 빚어낸 예술..국립극장 '소품 어벤저스' 4인방

2022. 8. 11.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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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소품 어벤저스' 4인방
디자인부터 제작·마무리까지 일당백
해오름극장 무대 에워싼 3~7층
3000종류 6000점의 소품 만물상
무대 공간 채워주고 액팅 만드는 소품
국립극장 소품실은 무대와 손의 역사
소품 제작방식과 역할도 변화
"국립극장은 유일한 제작극장..
우리가 전통과 미학 지킨다는 자부심"
무려 3000종류, 6000점.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3층부터 7층까지 이어지는 공간에선 선뜻 상상하기 힘든 별천지가 이어진다. 국립극장 소품실에선 정복모 소품실 실장(왼쪽)을 필두로 윤지현·박현이·채수형 씨가 ‘일당백’ 역할을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하늘도 싫고, 땅도 싫다’며 육지에서의 삼재팔란에 견디지 못해 유토피아로 향한 토자(兎子).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수궁은 휘황찬란하기 그지 없다. 길이 3m, 성인 여자 몸무게인 50㎏에 달하는 거대한 목어는 공중에 매달려 화려하게 발광한다. 단연코 이 무대의 ‘신스틸러’다. 개막을 앞둔 국립창극단 ‘귀토’(8월 31일~9월 4일)의 한 장면이다.

“목어는 제작 과정에서 디자인이 계속 달라졌고, 색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페인트로는 나오지 않는 색이 있어 표현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형광 안료를 써서 완성했어요.” (정복모 실장, 박현이)

국립창극단 ‘귀토’의 신스틸러인 목어. 수궁을 지키는 목어는 선명한 형광 녹색의 비늘, 핑크빛 입술, 흰색과 푸른색이 조화를 이룬 긴 지느러미, 바가지를 앞부분에 달고 있는 모습까지 용의 형상 같다. 임세준 기자

선명한 형광 녹색의 비늘, 핑크빛 입술, 흰색과 푸른색이 조화를 이룬 긴 지느러미…. 여기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듯한 모습은 영락없이 수궁을 지키는 ‘바다의 용’이다. ‘없던 디자인’도 추가됐다. 연출을 맡은 고선웅의 막판 요청이었다. “앞 부분에 말풍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소품실에선 이 한 마디에 고민을 거듭했다. “원래는 스티로폼을 깎아 만들려 했는데, 모양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가지였어요.” (정복모 실장) 자세히 살펴보면 ‘말풍선’ 같고, 멀리서 보면 ‘물거품’ 같다. 목어 입 앞에 따라온 ‘바가지’의 탄생 비화다.

남산 아래 자리한 서울 중구 국립극장. 이곳의 상징인 해오름극장의 뒷길로 향하면 극장을 지키는 사람들의 ‘공간’이 나온다. 그 중 하나가 무대예술부 산하 소품실. 1200여 석의 극장 무대를 중앙에 두고 에워싼 벽면은 소품실의 ‘비밀 창고’다. 1층 제작소를 시작으로 3층부터 7층까지, 그동안 국립극장 무대를 거쳐간 소품들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안무단체 고블린파티의 이경구는 국립극장 소품실은 “그야말로 별천지”이자 “영감의 원천”이라고 했다. “파주 제작소와 국립극장에 소품을 나눠 보관하고 있는데, 길게는 국립극장이 생길 때부터 있던 소품도 있어요.”(정복모 감독)

국립극장의 소품실을 책임지고 있는 채수형, 윤지현, 정복모 실장, 박현이 씨(왼쪽부터). 임세준 기자

■ ‘거대한 만물상’…3층부터 7층까지 6000개 채워 넣은 소품실

해오름극장 내 소품실은 거대한 만물상이다. 소품들이 3층부터 7층까지 벽마다 빼곡히 들어차있다. 무려 3000종류, 6000점의 소품이 자리한 이 곳에서 창작자들은 ‘뭔가’에 홀린듯 영감을 건지고, 무대 한켠에 자리할 ‘빛나는 조연’들을 찾는다.

국립극장 소품실엔 정복모 실장을 필두로 채수형·박현이·윤지현 씨가 ‘일당백’ 역할을 하고 있다. 국립극장 소속 예술단체(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일 년에 올라가는 공연만 해도 50여 편. 이 모든 공연에 들어갈 소품의 80% 이상을 이들이 담당한다. “한 작품당 소품 목록이 50여개 정도 되는데, 디자인부터 제작, 무대에 올리는 전 과정을 담당하고 있어요.” (정복모 실장, 박현이) 1993년 소품실에 입사해 무려 9명의 극장장과 함께 한 ‘터줏대감’ 정복모 실장은 “소품실에서 하는 일은 다른 파트에는 맡길 수 없어 제작부터 마무리까지 모두 이곳에서 진행한다”며 “소품의 질을 고려해 내부에서 모두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이 바로 국립극장의 ‘소품 어벤저스’다.

1993년 소품실에 입사해 무려 9명의 극장장과 함께 한 ‘터줏대감’ 정복모 실장은 “소품실에서 하는 일은 다른 파트에는 맡길 수 없어 제작부터 마무리까지 모두 이곳에서 진행한다”며 “소품의 질을 고려해 내부에서 모두 하고 있다”고 말했다.임세준 기자

무대 위 ‘소품의 영역’은 모호하다. 무대 장치와 의상, 장신구의 경계를 넘나든다. 채수형 씨는 “국립극장에선 기존 공연과 달리 테이블과 의자와 같은 대도구도 무대 장치가 아닌 소품으로 분류한다”고 말했다.

“무대를 꾸미는 소품도 있고, 들고 나와 움직임에 도움을 주는 것도 있어요. 무대엔 아기자기한 여러 소품이 나오지만, 소품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무대 공간을 채워주는 것’이에요.” (정복모 감독)

박현이 씨는 “무대가 공간을 만들어준다면, 의상은 캐릭터이고, 소품은 오브제로서 액팅을 만들어주는 역할”이라고 말했다.

소품의 제작은 디자인부터 시작한다. 디자인이 나오면, 그것을 구현할 자재 조사와 구입을 진행하고, 본격적인 제작에 돌입한다. 이 모든 과정은 100% 수작업이다.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손으로 빚어내는 아날로그의 현장이다.

국립창극단 ‘도미부인’에 나오는 의물은 스티로폼 안에 얇은 합판을 대고 일일이 손으로 조각해 만들어졌다. 임세준 기자

소품의 종류마다 소재는 천차만별이다. 국립극장에선 전통 기반의 공연이 주가 되는 만큼 한지와 볏짚, 부직포를 사용한 소품도 상당수다. 탈도 종류마다 재료가 모두 다르다. 십이지신 탈만 해도 종이, 대나무, 스펀지로 제작한 세 종류나 가지고 있다. 탈의 경우 대나무를 조각하기도 하고, 일반적인 나무를 사포로 문지른 뒤 칠을 하거나, 스티로폼으로 모형을 만든 다음 천을 부착해 조각하는 방식이 기본이다.

“재료마다 특성이 있어 뭐가 낫다고 할 수는 없지만, 조각을 해야 하는 소품의 경우 제작하는 입장에선 딱딱한 재료가 더 편하긴 해요. 스티로폼을 하나하나 조각하다 보면 부러질 염려가 있거든요. 그럴 경우 실험을 거듭해 견고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어요.” (정복모 실장) 2012년 무대에 오른 창극 ‘도미부인’에서 나오는 의물이 대표적이다. 이 의물들은 스티로폼 안에 얇은 합판을 대고 일일이 손으로 조각을 이어갔다.

제작 과정에선 고려해야할 것들이 많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다. 소품을 들고 쓰고 타는 모든 것을 창극 배우, 무용수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 감독은 “소품을 무대에서 잘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안전이 일순위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십이지신, 처용을 비롯한 각종 동물의 탈은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생김새와 착용감을 수시로 확인한다. “얼굴이 닿는 부분에 스펀지를 대서 불편하지 않게 하고, 시야 확보를 위해 눈 부위도 잘 맞춰야 해요.” (정복모 실장) 무게도 중요하다. 과거엔 탈을 만들 때도 전통 소재인 ‘에팔피’를 썼으나, 조금 더 가볍게 만들기 위해 지금은 종이를 사용한다.

한 번 사용하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기에, 제작 단계부터 보관 역시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된다. 정 감독은 “애초에 보관을 생각해 적당한 사이즈로 만든다”고 말했다. 규격 엘리베이터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여야 국립극장 소품실에 안착할 수 있다. 박현이 씨는 “길쭉한 소품들을 무대 아래에서 끈으로 매달아 3, 4층으로 옮기고 있다”고 말했다. “다행히 아직까진 떨어진 적은 없어요. (웃음)” (정복모)

국립극장 소품실 직원들이 4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무대의 역사’이자 ‘손의 역사’…“사라지고 있지만 우리가 전통”

국립극장 소품실은 무대의 역사이자,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과 그 ‘손의 역사’다. 소품은 단지 무대를 위한 장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나라가 이어온 전통의 재연이기도 하다. 박현이 씨는 “이전과 비교하면 지금의 소품은 만드는 방식이나 소재, 디자인도 많이 달라졌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무대가 다양해지고, 기술이 진화하며 소품의 제작 방식과 역할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예전엔 전통적인 것을, 전통의 재료와 방식으로, 전통 무대를 선보였다면, 시간이 흐르며 점차 ‘무대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간소화, 현대화의 과정을 거쳤다. 무대미술에 대한 개념도 달라졌다. “공연 자체는 전통이지만, 전통을 무대 안에서 재현하는 것이라 연출가들이 자신의 뜻대로 그림을 그려넣고 있어요. 기술적인 부분을 노출하는 경우도 많아졌고요.” (박현이)

지금의 무대는 대형 LED가 장악, 수작업으로 만든 소품은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박현이 씨는 “예전엔 모든 장면마다 설명적 소품이 들어갔지만, 지금은 수적으로는 줄었다”고 했다. 정 감독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다. 그는 “점차 무대 미술이 잠식해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국립창극단 ‘리어’ 속 갈매기 솟대. 임세준 기자

숫자는 줄었지만, 역할은 커졌다. 소품은 무대 위에서 “강렬한 오브제로 존재”하고 있다. 국립창극단의 창극 ‘춘향’에 등장한 나귀나 ‘리어’ 속 갈매기 솟대, ‘귀토’의 목어나 해파리처럼 존재감만으로 무대를 장악하는 소품이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흐름이다. 그만큼 소품 제작은 정교해지고, 품이 많이 들어간다.

“LED 영상을 많이 쓴 이후로 무대는 점점 차가워지고 있는데, 작은 소품이 따뜻한 느낌을 주더라고요. 오브제는 사람의 몸과 배우의 액팅과 닿는 부분이라서 그런지, 실질적 물질이 주는 존재감이 있어요. 그 존재감이 무대에 놓여 있어 여전히 소품을 쓰게 되는 것 같아요.” (박현이)

늘 무대 뒤에 있기에 관객 앞에서 박수 받을 일은 거의 없다. 게다가 요즘엔 ‘3D업종’의 하나로 꼽혀 무대미술 분야는 점차 외면받고 있다. 그럼에도 ‘소품 어벤저스’는 그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통은 사라지고, 역할은 줄어든다고 하지만, 우리가 전통이라는 자부심이 있어요. 국립극장은 유일한 제작극장이에요. 겉모습은 바뀌고, 가치관은 달라지고 있지만, 우리가 제작하는 이곳이 전통과 소품의 미학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박현이)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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