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창경궁과 종묘 연결길, 90년 만에 열린 창경궁 종묘 사잇길
창덕궁 돈화문을 앞에 두고 고개를 돌리자, 그동안 눈에 익은 도로가 없어지고 터널이 보인다. 그 위는 흙과 돌로 쌓은 공원이다. 바로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을 연결하는 공원으로 일제강점기 때 훼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터널 앞에서 계단을 오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터널 입구를 한옥 정문으로 하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조선 왕조가 한양에 처음 지은 것은 법궁 경복궁과 군주의 위패를 모실 종묘이다. 이후 창덕궁, 창경궁 등을 완성했다. 이 창덕궁과 창경궁은 경복궁 동쪽에 있다 해 동궐이라 불렀다. 본래 창덕궁과 창경궁은 하나의 궁이다. 그리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북신문으로 종묘와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의 왕은 종묘 제례에 참석하기 위해 북신문을 이용했다. 이는 기록에 남아 있을 뿐이다.
수십 년 동안 서울 사람 대부분은 돈화문에서 이화동으로 가는 길 율곡로만 안다. 이 율곡로를 터널화하고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를 원래대로 복원하기 위한 공사가 시작된 것은 2010년이다. 이후 12년 만에 율곡로는 6차선 도로, 양쪽의 인도가 놓인 터널이 되었고 그 위는 축구장보다 큰 공원, 돈화문 일대의 월대, 종묘와 창덕궁, 창경궁의 원래 담장 등이 복원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훼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북신문도 있는데 아직은 현판도 달지 않고 출입 또한 되지 않는다.
종묘 관통 도로계획은 100년 전인 1922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일제는 도로 건설을 주장했지만 순종이 종묘 훼손은 안 된다며 반대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면서 건설이 시작되었다. 결국 1932년 일제는 종묘와 창덕궁, 창경궁을 갈라놓은 도로를 건설하면서 창덕궁과 종묘가 갈라졌고, 창덕궁 앞 권농동도 갈라졌다. 단순히 서울의 도로 편의를 위한 건설이 아닌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궁을 갈라 놓았다는 설도 있다. 이를 설로 치부하기에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의 흔적은 많다. 국토의 명산마다 큰 쇠막대기를 정상에 박아 정기를 끊은 것들이다. 일제의 이런 행위들은 매우 치밀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다.
이제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는 하나가 되었다. 그렇다고 국력이 갑자기 신장하고 사회 문제들이 단박에 해결될 리는 없다. 그럼에도 이런 작업이 필요한 것은 해방 후 77년이 지난 지금도 일제의 잔재가 곳곳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지우고, 원형으로 복원하는 작업은 시간과 관계없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후손의 도리이고 의무이다.
[글과 사진 장진혁(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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