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협곡열차 여행..봉화에서 태백까지

2022. 8. 1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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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 깊은 숲, 낙동강 물줄기가 빚어낸 협곡의 비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방법은 기차를 타는 것뿐이다. 백두대간의 협곡 사이를 느리게 달리는 협곡열차 ‘V-트레인’은 자동차로 여행해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신비한 풍광들을 생생히 보여준다. 봉화 분천역에서 태백 철암역까지, 절대 자연의 땅에서 만나는 뜻밖의 즐거움과 감동이 그곳에 있었다.

야생화언덕에는 지금 털부처꽃이 장관을 이룬다, v-트레인

그리 먼 거리가 아님에도 왜 이제껏 그곳을 ‘오지’라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구불구불 척박하게 이어진 지루한 국도를 따라 다니던,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의 그곳이 너무 강렬하게 남아있는 탓일지 모른다. 그랬다. 그 시절엔 청량사가 있는 봉화까지 가려면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북도를 거쳐야 마침내 경상북도에 닿았다.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지난한 여정의 끝에 봉화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난 봉화는 깊고 깊은 자연으로 눈이 부셨다. 어디를 가든 나무와 숲이었고, 온갖 돌과 바위가 있었으며 그 사이로 푸른 강물이 굽이쳐 흘러내렸다. 길을 걸을 때마다 펼쳐지는 자연의 풍광은 볼수록 깊었다. 높고 깊은 청량산의 심장처럼, 비밀스럽게 터를 잡은 청량사와 천길 벼랑 끝 응진전에서 바라보는 백두대간의 순수한 정기는 오지였기에 가능한 난공불락의 청정 자연 그대로였다. 봉화에 흠뻑 빠져, 가기 쉽지 않은 오지를 두고두고 로망하게 된 사연이다. 그러는 사이 세월이 흘렀고 세상이 바뀌었다. 오지는 절경으로 남았고, 이제 누구나 탐하는 여행 명소로 변모했다. 닿을 수 없는 시간에서부터 현재까지, 봉화는 깊고 푸른 자연을 지켜오고 있다.

머릿속까지 먹먹하게 하는 폭염의 날들이 이어지던 때, 봉화 깊은 숲의 청량한 그늘과 바람이 그리웠다. 이럴 때면 늘 달려가곤 하던 동해의 바다 대신 숲과 그늘 그리고 그 사이로 부는 바람이 생각난 건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은밀한 자연 속에 나를 숨기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다. 봉화로의 여행은 그렇게 결정됐다. 가는 방법도, 가서 무엇을 할 건지도 이전과는 달랐다. 사방팔방으로 길이 나고, 가는 방법도 숱하게 많아진 세상이 되자 생각이 달라졌다. 그렇게 조급해 했던 과거는 까맣게 잊고 가급적 느긋한 여정을 찾는다. 그래서 이번엔 느리게, 그리고 천천히 봉화를 만나기로 했다.

그 중심에 백두대간협곡열차가 있었다. 봉화 분천역에서 태백 철암역까지 백두대간의 협곡 사이를 느릿느릿 달리는 기차를 타고 자동차로는 절대 볼 수 없는 풍경 속으로 깊이 빠져들 계획이다. 그리고 기차를 타기 전 봉화에서, 또 종착역인 태백 철암역에 내려서 한참 동안을 자연과 역사의 한 자락을 탐닉할 계획도 세워두었다. 과거에 만났던 그곳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여정에 대한 설렘은 한 줌 아쉬움 없이 퍼부어대는 한여름의 폭염마저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백두산호랑이가 사는 곳 봉화 ‘백두대간수목원’

호랑이숲에는 여섯 마리의 백두산 호랑이가 산다, 수목원을 편히 즐길 수 있는 트램
봉화는 때 묻지 않은 순수 자연이 온전하게 간직된 고장이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비경은 무려 ‘48경’의 경승지를 자랑한다. 그 가운데 명승 제23호로 지정된 도립공원 청량산은 빼어난 봉화의 자연을 대표하는 곳이다. 장인봉과 선학봉, 연화봉 등 12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지고 유유히 감싸 흐르는 낙동강의 물결은 눈길이 가는 곳마다 비경을 만들어낸다.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천년고찰 청량사는 작고 소박한 도량이지만 고즈넉한 산사의 압도적 아름다움을 지닌 봉화의 대표적 풍경이다. 그곳에서 매년 가을 펼쳐지는 산사음악회는 봉화를 세상 밖으로 알린 웰메이드 음악 축제로 꼽힌다. 요즘 봉화를 찾아오는 수많은 여행자가 그곳을 처음 알게 된 계기가 청량사 산사음악회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봉화에서 청량산과 청량사의 존재는 상징적이다. 하지만 이번 봉화 여행의 목적지는 청량산이 아니다. 사계절 모두 빼어나게 아름답지만, 그래도 청량산은 가을이 끝내주니까 산사음악회와 연계해 다시 찾아오리라는 다짐을 해본다.

아주 오랫동안 봉화의 얼굴이 청량산이었다면 요즘 확실하게 떠오른 여행 명소는 호랑이가 살고 있다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다. 수목원에 웬 호랑이? 그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곳이 백두대간의 한 줄기이고, 그곳에 사는 호랑이가 백두산 호랑이라면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봉화 춘양면에 조성된 백두대간수목원은 약 1400㎞에 이르는 한반도 생태계의 핵심축인 백두대간의 자생식물을 보존하고 고산식물에 대한 수집과 연구를 주목적으로 탄생한 수목원이다. 전체 면적이 5179㏊로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자연 친화 공간 내에는 암석원, 야생화 언덕, 만병초원, 꽃나무원, 무지개정원 등 39개의 주제 전시원이 있고 그곳에서 구상나무, 모데미풀, 설앵초 등 다양한 희귀 특산식물들과 월귤, 한계령풀, 만병초와 같은 고산식물을 볼 수 있다. 보유하고 있는 식물만 해도 무려 3145종이니 이 땅에 자생하는 거의 모든 식물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두대간수목원의 특별함은 그곳이 한국의 시드 볼트(Seed Vault)라는 점이다. ‘시드 볼트’란 전 지구적 차원의 재앙에 대비해 영구적으로 식물 종자를 보관하는 시설로, 노르웨이 스피츠베르겐섬의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볼트’와 함께 전 세계에 단 두 개밖에 없는 야생식물종자 영구저장시설이다. 지하 46m, 길이 130m의 지하터널에 설치된 종자 저장시설은 영하 20도를 유지, 종자는 최대 200만 점까지 저장이 가능하며, 외부 침입에도 안전한 ‘다’ 등급의 국가 보안시설이다. 그런데 왜, 이곳 봉화에 시드 볼트가 생겼을까, 하는 의문이 또다시 들 만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어떠한 환경적 변화에도 종자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을 만큼 안전한 곳이라는 이유다. 백두대간수목원이 있는 봉화군 춘양면은 조선시대 ‘5대 사고’ 중 하나인 ‘태백산사고’가 있었던 지역이다. 조선 후기 때부터 나라의 중요한 문서를 보관하기 위해 선택된, 전국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었다.

백두대간수목원이 특별해진 또 하나의 이유는 앞서 얘기했듯 그곳에 호랑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수목원이지만 그곳에는 백두산 호랑이의 보금자리인 ‘호랑이숲’이 조성돼 있다. 우리 땅에서 사라진 지 100년이 된 멸종위기종인 백두산 호랑이의 종 보전을 위해 만든 곳으로, 현재 한청, 우리, 한, 도, 태범, 무궁 등 모두 여섯 마리의 호랑이가 살고 있다. 호랑이숲은 3.8㏊로 커다란 산 정도의 크기. 우리가 흔히 연상하는 동물원의 모습과는 크게 다르다. 관람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사파리처럼 관람차를 타고 들어가 보는 것도 아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관람 장소로 가면 그곳에서 육중한 체구, 늠름한 모습의 백두산 호랑이를 만나볼 수 있다. 호랑이숲 앞에서는 관람객들의 환호와 탄성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온다. 말이 호랑이지 그걸 실제로 보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더구나 동물원에 갇힌 호랑이가 아니라 백두대간의 숲을 당당히 거니는 호랑이라니. 호랑이숲이 백두대간수목원 내 최고 인기의 핫플레이스가 된 건 당연한 일이다.

백두대간수목원을 둘러보기 위해선 두 량의 관람차가 연결된 트램을 타는 게 좋다. 방문자센터 뒤편에 있는 출발역에서 트램을 타고 약 10분 정도 이동, 단풍식물원역에서 내린 후 진달래원, 사계원, 거울연못 등을 돌아본 뒤 야생화 언덕, 암석원, 자작나무원, 호랑이숲, 고산습원, 수변생태원, 돌틈정원, 무지개 정원 순으로 걸어서 천천히 관람하는 코스다. 시간과 체력을 고려해 수목원에서 마련한 ‘쉬엄쉬엄 산책’, ‘깊은 숲속 호랑이’, ‘수목원 완전정복’ 등의 맞춤형 관람 코스를 따라 관람하는 것도 백두대간수목원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방법이다. 지금 백두대간수목원은 ‘봉자페스티벌’ 준비가 한창이다. 지역 농가에서 키운 자생식물로 지역 상생의 가치를 알리는 ‘여름 봉화 자생꽃 페스티벌’이다. 페스티벌은 8월7일에 끝이 나지만 39개 전시원 모두에서 우리 꽃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고, 특히 야생화 언덕에 심어놓은 50만 포기의 털부처꽃이 연출하는 아름다운 핑크빛 정원의 장관도 감상할 수 있다. 또 가로 15m, 세로 8m의 대형 호랑이 조형물 백두랑이와 백두대간을 지키는 산할아버지 포토존에서는 멋진 인생샷을 남길 수 있다.

백두산 호랑이(사진제공 백두대간수목원)
▷ Info |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위치 경북 봉화군 춘양면 춘양로 1501 운영 시간 3~10월 09:00~18:00, 11~2월 09:00~17:00 *월요일, 1월1일, 설·추석 휴관 입장료 성인 5000원, 청소년 4000원, 어린이 3000원 트램 이용료 성인 1500원, 어린이 및 청소년 1000원

▶천천히 가야만 보이는 풍경 ‘백두대간협곡열차’

백두대간협곡열차. 영화 제목에 썩 어울릴 거 같다고 생각했다. 뭔가 짜릿하고 익사이팅할 것 같은 이름이지만 사실 기차는 모던하면서도 클래식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빨간색으로 치장한 3량의 객차를 ‘아기백호’란 애칭으로 불리는 하얀 호랑이 무늬의 기관차가 이끈다. 객차는 사방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어 창밖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고스란히 눈에 담을 수 있다. 기차가 아니면 갈 수 없는 곳, 높고 깊은 협곡의 신비스러운 풍경을 보기 위해서 이만한 교통수단이 또 있을까. 봉화 분천역에서 태백의 철암역 사이, 27.7㎞를 달리는 백두대간협곡열차는 일명 ‘V-트레인’으로 불린다. ‘V’는 물론 협곡을 의미하는 ‘Valley’에서 따왔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협곡을 달리는 관광열차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시속 30km의 속도로 달리며, 정차하는 역마다 10분 정도의 휴식 시간을 제공한다. 그 시간 동안 승객들은 잠시나마 산골 마을의 정취를 감상할 수 있다. 바쁜 세상, 목적지를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리는 세상에서 시속 30㎞라니, 비효율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백두대간협곡열차의 맛은 그것이다. 높은 산과 계곡의 구불구불한 지형을 따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 철로를 느릿느릿, 그리고 쉬엄쉬엄 돌아가는 기차 여행은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기차가 단순히 목적지로 가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여행이 되는, 아날로그 여행의 백미를 맛볼 수 있다.

분천역은 역사와 주변 모두가 산타 테마로 꾸며져 있다.
생전 처음 가본 분천역은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하다. 우리나라에도 산타마을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곳을 직접 보는 기분은 새롭고도 묘했다. 더군다나 한여름에 만나는 산타마을이라니. 스위스의 어느 산골 마을에 온 듯한 느낌을 주는 분천역은 일 년 내내 크리스마스다. 역사 곳곳에 산타 할아버지의 조형물이 서 있고, 루돌프가 끄는 썰매와 대형 트리, 흰곰과 이글루의 조형물까지 온통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장식들로 꾸며져 있다. 눈이 내리는 한겨울의 정취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 초록이 짙은 한여름에도 전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1970년대까지 탄광과 벌목으로 호황을 누렸다던 분천역. 시대가 바뀌고 산골 마을을 융성하게 하던 산업이 쇠퇴하면서 폐쇄 직전의 간이역으로 쪼그라들었던 곳이 사계절 사람들이 찾아오는 여행 명소가 되었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2013년 스위스 체르마트와 자매결연을 맺은 분천역은 그다음 해 핀란드 로바니에미의 산타마을을 벤치마킹해 분천산타마을을 만들었다. 역사 앞의 작은 마을도 아름다운 산골 마을의 정취가 가득하다. 기차를 타기 전, 충분한 시간을 두고 도착해 마을을 산책하거나, 한적한 카페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해도 좋겠다. 분천역은 물론 산타마을 전체가 멋진 포토존이어서 인생샷을 남기기에도 좋고, 산타우체국, 갤러리, 시네마, 썰매와 레일바이크 등 즐길 거리도 많다.

분천역을 출발한 열차는 비동역과 양원역, 승부역을 거쳐 철암역까지 간다. 임시 정거장인 비동역에서는 아주 잠깐 정차한다. 비동역과 양원역 사이에는 낙동강 물길과 철길을 따라가는 약 2.2km의 명품 트레일 코스 ‘체르마트길’이 있는데 이 길을 걷는 도보 여행자들을 위해 잠시 멈춰 서는 것이다. 양원역과 승부역에서는 정차 시간을 10분 정도 넉넉히 제공한다. 승객들이 꼭 챙겨봐야 할 마을의 역사와 문화,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이다. 천천히 가는 열차는 협곡의 아름다운 경치와 그림처럼 뻗은 철길,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승객들의 분주함과 어울려 정겨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분천역을 떠나 양원역까지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원덕마을에 위치한 양원역은 마을 주민들의 오랜 여망으로 만들어진 간이역이다. 서지 않는 기차를 세우기 위해 주민들이 직접 대합실과 승강장을 만든 대한민국 최초의 민자 역사로 유명하다. 그 기적과 같은 감동 스토리는 ‘기적’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마치 미니어처같이 작은 역사가 ‘양원역 대합실’이란 이름표를 달고 서 있는 모습이 정겹다. 세 평 하늘 아래 기차역이라고 불리는 승부역은 ‘하늘도 세 평, 땅도 세 평’이라는 말로 유명하다. 역에서 보면 하늘이 세 평으로 보일 만큼 첩첩산중이어서 생겨난 말이다. 기차가 잠시 정차하는 동안 승부역에서는 작은 장터가 열린다. 마을 어르신들이 채취한 각종 산나물과 약재를 판매하고, 감자전과 메밀전병, 도토리묵도 만든다. 그곳에서 마시는 막걸리 한 잔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맛이다. 음식 먹을 시간이 모자란 승객들은 먹거리를 포장해 기차에 오르기도 한다. 짧은 시간에 누리는 행복, 여행의 맛이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는 간이역 풍경이다.

달리는 기차에서는 백두대간 협곡이 숨긴 수많은 절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높은 산과 깊은 숲, 맑은 강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역시나 기차가 아니면 도저히 볼 수 없는 숨은 비경들이다. 창밖 풍경에 빠져 있는 사이 기차가 천천히 철암역으로 다가선다. 1시간 10여 분 동안의 백두대간 협곡여행이 끝나는 순간이다. 철암역에 도착한 기차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분천역으로 돌아간다. 백두대간협곡열차는 하루 두 차례, 분천역과 철암역을 오가고 그중 한 편은 영주역에서 출발해 분천역을 경유한다. 따라서 언제 어느 열차를 탈 것인지, 탑승역을 어디로 할 것인지에 따라 봉화와 태백을 좀 더 깊고 넓게 여행할 수 있다.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은 운행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검은 도시’ 철암의 흔적 그대로 ‘태백 철암탄광역사촌’

고단했던 광부의 삶을 표현한 조형물
철암역을 생각하면 비지스(Bee Gees)의 노래 ‘홀리데이’가 떠오른다. ‘홀리데이’가 철암역에서 생각나는 건, 20여 전에 만들어진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안성기와 박중훈의 빗속 결투 장면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었다. 처절했고 비장했던 그 장면을 찍은 곳이 바로 철암역두 선탄장이다.

‘검은 도시’로 통했던 태백 철암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국내 최대의 선탄 시설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캐낸 석탄을 전국으로 운반하던 곳이 철암역이다. 석탄산업이 활발했던 시기에는 광부들과 그 가족 등 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지금은 1970년대에서 시계가 멈춘 듯 적막하기만 하다. 기차역은 깨끗하게 단장돼 있고, 그 주변에는 아직 과거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선탄장 근로자들과 그 가족들이 살았던 이야기들을 그린 벽화도 눈길을 끈다. 기차에서 내리면 뒤편으로 거대한 규모의 선탄장이 보인다. 석탄을 선별하고 가공 처리하는 이곳 선탄장은 1939년 이전에 만들어진 국내 최초의 무연탄 선탄 시설로, 근대산업 역사의 상징적인 시설로 평가받아 지난 2002년 등록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됐다.

철암역 길 건너 개천가에는 사람들이 모두 떠난 빈집들이 잔뜩 쇠락한 모습으로 서 있다. 철암천변에 쭉 늘어선 까치발 건물들이다. 옛 탄광촌의 허름한 상점들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보전해 생활사박물관으로 재활용한 ‘철암탄광역사촌’이다. 역사촌 건물 뒤로는 아내가 아이를 업고 남편에게 손을 흔들고 있고, 개천 맞은편에는 아내와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일터로 나가는 아빠의 모습과 탄광 갱도에 앉아 쉬는 광부의 모습을 담은 조형물이 만들어져 있다. 갱도 기둥에 적혀있는 ‘아빠! 오늘도 무사히’란 글귀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철암탄광역사촌은 말 그대로 과거 석탄산업이 활발하던 시절의 생활사와 그 흔적들을 재현해놓은 곳이다. 사람은 떠나고 없지만 그들이 살았던 삶의 일면을 고스란히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곳을 찾는 여행자들로선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으로의 시간 여행이자, 추억 여행을 해볼 수 있는 곳이다. 곧 쓰러질 듯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서 있는 건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충 포즈를 취해도 인생샷이 되는, 걸작 사진의 배경이 되곤 한다. 개천 바닥에 기둥을 박아 건물을 지지하는 까치발 건물들은 마치 영화의 세트처럼 신기한 모습인데 11동의 건물이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현재 생활사박물관과 아트하우스로 활용되고 있는 건물은 크게 6개. 페리카나, 호남슈퍼, 진주성, 봉화식당, 한양다방 등 당시의 간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그 건물 2~3층의 공간을 우리나라 석탄산업의 과거와 현재를 재조명하는 공간으로 꾸며놓았다. 건물 가운데는 당시 광부들이 즐겨 찾던 선술집과 짜장면집 등 실제 식당이 복원돼 있어 여행자들이 이용할 수도 있다. 건물 내부에 꾸며진 전시관이 궁금했다. 그곳에는 과연 어떤 세상이 존재하고 있을까. 외관과는 달리 내부에 꾸며놓은 전시관들은 웬만한 갤러리 못지않게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그곳에서 만나는 ‘검은 도시’ 철암의 생생한 역사는 짠하고 또 팍팍하다. 건물을 하나하나를 옮겨 다니며 그곳에 마련된 전시관을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숙연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곳에서 살다 간 사람들의 역사와 생활상이 갖가지 기록과 사진 등을 통해 증거되는 또 다른 삶의 현장. 여행자들에게는 앞선 세대를 향한 경외의 공간이 되기에 충분하다.
▷ Info | ‘철암탄광역사촌’

위치 강원도 태백시 동태백로 408

운영 시간 10:00~17:00 *1, 3주 월요일 휴관

[글과 사진 이상호(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42호 (22.08.16)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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