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아뉴스데이'와 폴란드의 악몽

조성관 작가 입력 2022. 8. 11. 12:00 수정 2022. 8. 1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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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뉴스데이' 포스터 /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아뉴스 데이'(Agnus Dei)라는 영화가 있다. 실화를 토대로 만든 영화다. 무대는 1945년 12월 폴란드. 2차세계대전은 끝났지만 독일군과 소련군은 아직 폴란드 땅에서 다 철수하지 않은 상황이다.

적십자(Red Cross)에서 근무하는 프랑스 여의사 마들렌 폴리악은 우연히 한 수녀의 간청으로 소련 점령지역 안에 있는 수녀원을 찾는다. 여의사는 그곳에서 원치 않는 임신으로 집에서 쫓겨난 한 여성의 출산을 돕는다. 얼마 뒤 여의사는 출산의 진실을 알게 된다.

소련군과 독일군에 의해 폴란드 수녀들이 짓밟혀 집단 임신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수녀원은 이를 쉬쉬하고, 여의사가 목숨을 걸고 수녀들의 출산을 돌봐준다는 스토리가 '아뉴스 데이'다.

폴리악은 폴란드에 남아 프랑스군 송환을 돕던 중 1946년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후 70년이 흐른 뒤 조카가 우연히 폴리악의 유품 속에서 노트를 발견하면서 소련군과 독일군의 만행이 드러났다.

이 노트를 토대로 안느 퐁텐 감독이 연출, 2017년 개봉한 영화가 '아뉴스 데이'다. Agnus dei는 라틴어로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뜻.

폴란드 바르샤바 / 사진출처 =구글 지도 갈무리

나라 잃은 188년의 시간

나는 '세계인문여행'을 연재하면서 언젠가는 폴란드 이야기를 한번은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뉴스 데이'를 비롯한 이런저런 메모를 해놓고 발효시키고 있었다.

김앤장 최기록 변호사는 유엔헤비타트 한국위원회 회장이다. 최 회장이 지난 7월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열린 유엔해비타트 총회에 다녀왔다. 귀국 직후 저녁 모임에서 그를 만났다.

나를 보더니 폴란드 출신 천재들 이야기를 꺼냈다. 프레드릭 쇼팽, 마리 퀴리, 코페르니쿠스 등을 거론하면서 한번 다뤄봐도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세계인문여행에 다루려고 기회를 보고 있노라고 했다.

단언컨대 세계사를 통틀어 폴란드처럼 가혹한 운명의 주인공이 된 나라도 찾기 힘들다. 폴란드인은 유럽에서 유대인 다음으로 나라 잃은 설움과 한(恨)을 대대로 품어온 민족이다.

폴란드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체코,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과 함께 슬라브 민족의 분파가 세운 나라다.

폴란드의 폴란드어 이름은 폴스카(Polska). 폴레인의 나라라는 뜻이다. 폴레는 평원을 뜻하는 옛 슬라브어 폴리에(polie)에서 나왔다.

평원은 평화 시기에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기에 축복받은 땅이다. 하지만 평화가 깨지면 평원은 야속한 땅덩어리로 전락한다. 외적의 침입을 막아주거나 지연시키는 천혜의 장애물이 없어서다.

폴란드 지도를 펼쳐 보자. 산악지형을 의미하는 진한 갈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이 녹색에 가까운 연둣빛이다. 동서남북 다 그렇다. 실제로 국토의 75%가 해발 200m 아래다.

1795년 폴란드인에게 첫 번째 고난이 찾아왔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뒤다. 강대국인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의해 나라가 세 갈래로 찢겼다.

19세기 유럽 지도에서는 폴란드를 찾을 수가 없다. 폴란드는 그렇게 소멸했다. 프레드릭 쇼팽이 고향 바르샤바를 떠난 것은 폴란드가 사라지고 35년이 지난 1830년, 스무 살 때였다.

폴란드는 1차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국가로서의 지위를 회복한다. 3개국에 의해 분할 해체된 지 123년 만이다. 국호와 국가를 잃어버린 채 123년을 살아내야 했던 폴란드인을 생각해본다.

123년이란 세월은 한 민족이 공유한 집단의식이 DNA로 유전되고도 남는 시간이다. 폴란드에서는 집안에 친척이 찾아오면 반드시 식탁에 검은색 호밀빵을 내놓는 전통이 있다. 딱딱하고 맛없는 빵을 일가 친척이 함께 나눠 먹으며 나라를 잃은 채 살아가야 했던 조상들의 설움과 한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폴란드인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알려진 대로 2차세계대전은 나치 독일이 1939년 10월 발트해에 면한 폴란드 항구도시 그단스크를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나치 독일이 서쪽에서 바르샤바를 향해 진격해 들어오자 화들짝 놀란 소련이 다시 폴란드의 동쪽 국경선을 허물고 침입했다.

불과 3주 만에 폴란드는 나치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20년 만에 또다시 국가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치 독일의 바르샤바 점령 장면을 실감 나게 묘사한 책이 있다.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에서 살아남은 브라티슬라바의 회고록 '피아니스트'에서다. 앞서 소개한 영화 '야누스 데이'는 소련 점령지의 수녀원에서 벌어진 일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의 폴란드를 배경으로 다룬 영화는 꽤 많다. '바르샤바 1944'는 나치 치하 바르샤바에 벌어진 반(反)나치저항군을 그린 영화다.

폴란드 젊은이들이 반나치 저항군에 입대해 전쟁을 벌인다. 처절하게 싸워보았지만 화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정규군 독일군에게 괴멸된다.

독일의 항복으로 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폴란드는 소련에 의해 공산화된다. 이후 45년간 공산체제에서 신음한다.

1920년대의 마리 퀴리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마리 퀴리와 조셉 콘라드

노벨 물리학상(1903)과 화학상(1911)을 수상한 마리 퀴리(1867~1934)의 삶을 폴란드 역사와 병치시켜 보자. 마리는 1867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바르샤바가 제정 러시아의 압제에 신음할 때다.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마리는 바르샤바에서는 길이 보이지 않자 언니를 따라 파리로 간다. 그때 나이 스물네 살. 이민자인데다 여성이었다. 이중의 핸디캡을 딛고 천신만고 끝에 여성 과학자로 독립하는 과정은 인간승리다.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면서 프랑스 국적을 얻는다.

그가 발견한 물질 폴로늄과 라듐이다. 왜 폴로늄인가. 새로운 물질에 사라져버린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그가 발명한 방사선이 병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돌자 프랑스인들 사이에 잠복해 있던 질투와 시기가 일제히 폭발한다. '폴란드 쓰레기' '네 나라로 돌아가라'

'어둠의 심연'과 '로드짐'을 써낸 폴란드계 영국 소설가 조셉

조셉 콘라드(1867~1924). 바르샤바 태생인 그는 부모가 반러시아 운동을 벌이다 처형되면서 외삼촌 슬하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몸이 아파 학교를 빠지는 일이 많자 그는 집에서 탐험소설을 읽으며 상상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프랑스 상선을 거쳐 스무살에 영국 상선을 탔다. 영어를 거의 할 줄 몰랐던 그는 영국배를 타면서 선원 영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영국 상선을 타고 그는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식민지를 대부분 돌아다녔다. 영국인 누구도 하지 못한 진귀한 경험이었다.

그는 1894년 출렁이는 배에서 내려 뭍으로 나왔다. 20년 만에 단단한 땅을 밟았다. 그리고 한번도 써보지 않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899년, 네 번째로 써낸 작품이 '어둠의 심연'이다. 서슬 퍼런 제국주의 한복판에서 제국주의 폐해를 꿰뚫어 본 소설. 이 위대한 영어소설의 탄생은 망국(亡國)의 폴란드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미국 타임지 1923년 4월 7일자 표지인물로 실린 조셉 콘라드.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폴란드의 20조원 무기 구매

폴란드, 체코, 헝가리는 냉전 시대 소련의 위성(衛星) 공산국이었다.

나치와 공산주의라는 전체주의 체제를 뼈저리게 경험한 이들 국가들은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다.

공산권이 무너진 지 9년 만에 일찌감치 자유 세계의 리더인 미국 편에 선 것이다. 벨라루스, 몰도바 등이 여전히 푸틴의 눈치를 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중립국을 표방하던 핀란드와 스웨덴 역시 NATO 가입을 신청했다.

폴란드가 20조원대의 한국산 무기를 구매하기로 한 것이 폭염 속에 화제가 됐다. K2전차, K9자주포, FA-50경공격기 등이 대상이다. 방산(防産) 수출로는 역대 최대 규모라고 한다.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에서 보듯 푸틴의 러시아는 스탈린 소련의 재림이다. 공산주의 폭정(暴政)을 45년간이나 경험한 폴란드는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끔찍한 악몽이 되살아났으리라.

2차세계대전 기간 중 건물의 85% 이상이 파괴된 바르샤바 시가지 모습/ 사진출처=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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