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좌파, 종북' 주장의 뿌리는 국보법, 수구보수 세력이 악용
[국보법 연재 (16)] 한국적 보수와 진보는 보안법 테두리 속에서의 진영 나누기
[미디어오늘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대소 선거에서 수구, 보수 세력은 진보, 좌파, 종북을 한데 묶어서 말이 되건 안 되건 간에 비판하고 공격한다. 이 세 단어가 각각 차이가 있을 법하지만 그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싸잡아서 비판하는데 그것은 북에 동조하거나 남한 체제에 적대적인 것이라는 의미가 담긴 듯이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북한에 퍼주기를 한 좌파에게 정권을 넘길 수 없다. 진보 정권이 나라를 망쳤다'는 식으로 짧은 문장에 담아 TV 토론에서나 유세장에서 외친다.
왜 그럴까? 그렇게 하는 것은 득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전체 주류사회가 좌파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라는 것, 그래서 곱지 않은 눈초리를 보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다. 국보법의 영향과 남북 대치와 걸핏하면 발생하는 전쟁 위기 속에서 이 단어들에 대한 부정적 의미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보수, 우파는 안전지대에서 보호받는다는 고정관념 강해
남한 사회에서 보수, 우파라는 단어는 안전지대에서 보호받는 것이 보장된다는 고정관념이 지배적이다. 우파는 아무데서나 '나 보수요, 우파요'라고 큰 소리를 칠 정도다. 체제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큰 공감대 속에서 안도감과 상당한 정도의 우월감을 느끼는 그런 태도다.
반대로 진보, 좌파, 종북은 부정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거나 더 이상의 토론이나 대화 할 필요 없이 '그래, 그렇지'라는 단정적인 의미, 즉 낙인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낙인은 불에 달구어 찍는 쇠붙이로 만든 도장이라는 의미다. 씻기 어려운 잘못을 저질러 부정적인 평판이 굳어진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들 단어는 '너는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나쁘다'라는 지적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이 사회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단어를 상대에게 사용하는 쪽은 이들 단어가 국보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잘못하면 국보법으로 걸릴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의 뜻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 단어는 정치권을 포함해 사회 도처에서 갈등이나 경쟁 관계일 경우 최종적인 공격 수단, 무기로 사용된다. 이들 단어는 상대와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면서 상종할 수 없는 존재로 낙인을 찍으려 할 경우 사용되는 초강력 무기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대화나 논의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며 던지는 최후통첩과도 같다.
국보법 사건에 연루되면 패가망신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진보, 좌파, 종북이라는 단어는 그 의미가 딱 부러지게 정해져 있지는 않다. 사용하는 사람마다 그 의미가 다른 경우가 많다. 장소에 따라 전달되는 의미에 차이가 난다. 고무줄처럼 쉽게 늘어나고 줄어든다. 그러니 이들 단어를 놓고 논쟁이 붙으면 초반부터 막히고 합의점을 찾기 어렵다. 상대에 대해 목소리만 높이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생산적인 논쟁이나 협의할 때 사용하는 단어는 그 개념에 대한 합의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이들 단어에 대해 아직 그렇지 않다. 그런 탓인지 토론 문화가 존재치 않는다고 흔히 말하고 실제 그렇다. 이들 단어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된다. 이런 특성 때문에 파괴력도 높다. 듣는 사람 마음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면 분위기부터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수구보수는 잘 알고 있다. 영악한 정치인이나 선동가들은 그래서 이들 단어를 강조하는 표현 기법을 사용하는데 익숙하다. 이승만이 만들어 놓은 반역사적이며, 동시에 범죄적인 흉기를 습관적으로 흔들어대는 것이다.
국보법에 저촉되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폐지됐지만 연좌제가 적용되던 때는 국보법 사건에 연루되면 패가망신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국보법은 그래서 지금도 공포의 대상이다. 진보, 좌파, 종북으로 낙인찍힌다는 것은 유무형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여전히 뿌리 깊다.
'종북'이라는 단어, 2001년 11월 민주노동당 기관지 등에 처음 등장
'종북'이라는 단어는 언제 나왔을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이른바 진보진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2001년 11월 민주노동당 기관지 등에 '친북'과 구별하기 위해 처음 등장한 것이다. 이어 진보적 정당 간의 통합을 둘러싼 갈등 과정에서 “조선노동당의 외교정책을 우위에 놓는 '종북세력'과는 당을 같이 할 수 없다”는 식의 종북주의 노선 불참 선언이 나오면서 널리 알려졌다. '종북'이라는 단어는 그 후 수구보수 진영에서 진보진영을 공격할 때 자주 사용하게 된다. 동시에 좌파, 친북이라는 단어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2006년 일심회 사건 때 민주노동당내 분열이 심각해지면서 '종북주의'논란이 격화되고 '종북'이라는 단어의 사회적 관심도가 더욱 높아졌다. 이어 이후 19대 총선이 끝난 뒤인 2012년 5월 통합진보당 부정 경선 의혹 사건이 터지자 대중매체는 '통진당 내의 일부 인사들이 종북주의 성향이고 이들이 부정 경선과 관련이 있다' 보도했다. '종북'에 비양심적이라는 성향도 덧붙인 것이다.
이후 자유총연맹, 한국시민단체협의회 등 보수 시민단체들은 통합진보당 구당권파 의원들을 "종북 주사파 의원"으로 지칭하며 사퇴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어 2012년 7월에는 국무총리실, 외교부, 국방부 등 정부 부처들이 "종북좌파 의원 때문"이라는 이유로 국회의 자료 제출 요구에 불응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종북'이라는 단어는 수구보수가 진보를 공격하고 비난할 때 가장 많이 입에 올리게 되고 좌파, 친북 등의 용어와 함께 섞어 쓰는 현상이 광범위해졌다.
수구보수 세력은 선거철만 되면 '좌파, 우파 정권'을 내세우는데 이런 표현이 어떤 식으로 우리 사회에서 조건반사적 반응을 일으키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이른바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것이다. 레드 콤플렉스의 의미는 위키백과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레드 콤플렉스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극대화되어, 진보주의 자체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거나, 빨간색에 대한 반감을 가지는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가리킨다.
레드 콤플렉스라고 불리는 반공 이데올로기는 반공이라는 국시와 국가보안법이라는 강력한 반공법과 더불어, 분단 이후의 대한민국 사회 모든 영역에 침투되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대한민국에서 노동 운동이 태동하던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 자본가들은 노동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동일시하였으며, 그로 인해 국가보안법을 동원한 탄압이 횡행했다. 또한 혁신을 주장하는 진보주의 정당의 활동도 좌파에 대한 사회 전반의 거부감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시민들이 참여한 민주화운동으로 대한민국은 1987년 이후 민주화되었고, 북한 김일성의 사망과 북한의 경제의 위기로 레드 콤플렉스는 줄어들기 시작하였지만,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색깔론'이 기승을 부린다. --
'좌파, 친북, 종북'은 빨갱이로 매도 매장시키려는 '색깔론'
진보를 지칭하는 좌파, 종북이라는 단어는 레드 콤플렉스, 즉 이른바 빨갱이로 매도하면서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는 '색깔론'의 구체적인 형태에 다름 아니다. 색깔론은 시대에 따라 그 표현을 달리하는데 국보법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커지면서 최근에는 진보, 좌파, 종북과 같은 단어를 주로 사용해 표현되고 있다.
이승만이 만든 국보법이라는 괴물이 수구 보수 진영에 주는 부당이득이 어떤 것인지 수구보수 세력은 잘 알고 있고 시대 상황에 따라 이 법과 관련한 표현을 바꾸는 간교함을 보인다. 과거에는 빨갱이 사냥이라고 하다가 오늘날에는 종북, 좌파 척결이라는 식이다. 이런 현상을 18대, 19대 대선을 사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민주당, 18대 대선 패배 뒤 패인분석에서 '종북공세' 분석 대상서 제외
지난 2012년 실시된 18대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는 국보법의 존재에 철저히 대비한 정강정책을 내세웠다. 민주당은 일부 진보당 세력과는 처음부터 선을 그으면서 차별성을 강조했고 그 결과 새누리당 후보와는 몇 가지 점만 빼면 엇비슷한 대북 정책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새누리당 쪽에서 한술 더 뜨는 식의 공세를 취했다.
즉 서해북방한계선(NLL),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내용 폭로 주장 등 남북문제와 관련해 확인되지 않았거나, 실제 허위일지도 모르는 것을 앞세워 민주당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새누리당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 강경책으로 조성된 국내의 불안감과 정서에 편승하는 작전을 간교할 정도로 구사했다. 이는 국보법이 지배하는 현실을 십분 악용한 것이다.
18대 대선은 그 이전의 크고 작은 선거에서 흔히 그랬듯이 '북한 변수'가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당시 북한과 관련한 모든 것은 이 사회를 위협하는 것으로 규정되고 야당을 공격하는 무기로 새누리당 후보에 의해 악용되었다. 언론은 그것을 대서특필했다. 선거가 끝난 뒤 여권과 언론 등은 '보수와 진보의 진검 승부에서 보수가 승리했다'고 표현했다.
18대 대선이 끝난 뒤 민주당은 선거 패배의 패인 분석을 한다면서 후보 단일화, 정강정책 등에서의 문제를 다뤘지만 정작 이명박 정권 내내, 그리고 18대 대선 정국에서 기승을 부린 종북몰이나 친북 공세는 분석 항목에도 넣지 않았다.
민주당의 대선 패배 분석에 여러 가지 원인들이 제시되었지만 종북몰이나 친북 공세 또는 그 뿌리인 국보법이라는 무서운 변수에 대해서는 침묵한 것이다. 이는 어떤 면에서 보수가 쳐놓은 프레임의 그물에 걸린 모습으로 보였다. 즉 국보법이라는 무서운 괴물 앞에서 정치적으로 속수무책이라는 패배자 의식의 발로이거나 자칫 친북 정당으로 매도될 것을 두려워한 결과로 해석된 것이다.
18대 대선 전후의 여야 모습을 보면 한국적 보수와 진보는 국보법이라는 테두리 속에서의 진영 나누기라는 표현이 가능해진다. 한국적 진보는 서구의 진보가 누리는, 상한선 없는 사고의 영역을 제거 당한 그런 진보에 불과하다. 그 결과 한국적 진보가 국보법의 현실적 강제성을 인정하면 할수록 보수와의 차별성은 더욱 희박해지면서 둘이 닮은 꼴이 되는 것이다. 민주당은 19대 대선에서 승리하고 21대 총선에서 과반수가 넘는 대승을 거뒀지만 국보법 개폐에 대해 대단히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홍준표 19대 대선에서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 안보가 어렵다' 주장
지난 2017년 19대 대선에 출마한 홍준표 당시 경남지사의 경우에서 민주당 후보에 대한 색깔론 공세가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그는 지난 2017년 3월 “좌파정권이 들어서면 국익이나 국가안보에서 굉장히 어려워질 수 있다”며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를 비판했다(중앙일보 2017년 3월8일).
홍 전 지사는 자유한국당 초선 의원 32명을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말하고 “지금 (정국은) 좌파의 정권교체가 아니라 정권탈취”라며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관련해 “시위를 통해 헌재를 압박해 집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홍 전 지사는 그 며칠 뒤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반도미래재단 초청 특별 대담'에서 “우파 정부가 자기들에 반대하는 좌파 단체 리스트 만든 게 무슨 죄냐고 주장, 박영수 특검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수사 내용을 정면 반박했다(중앙일보 2017년 3월15일).
홍 전 지사는 “박근혜 정부는 우파정부다. 우파 정부에서 5년 집권을 하는데, 소위 반대되는 좌파 단체는 지원을 안 해도 된다.”며 이같이 말했다. 특검은 당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장관을 블랙리스트 작성 몸통으로 지목해 구속 기소해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홍 전 지사가 주장한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 안보가 어렵다. 청와대에서 만든 블랙리스트가 무슨 문제냐'라는 발언을 언론은 가감 없이 보도했다. 홍 지사가 말하는 좌파정권의 의미나 안보 불안이 어떤 것인지는 애매했지만 선거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선거 결과 홍 전 의원이 지칭한 좌파정권이 들어섰지만 국가안보가 불안해졌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홍 전 지사의 발언의 노림수는 색깔론을 내세워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특히 당시 블랙리스트가 국기를 뒤흔든 범죄행각으로 지탄받았고 그 관련자가 처벌받을 상황이었는데도 청와대의 범죄행각을 '좌파를 상대로 했으니 괜찮다'는 식으로 옹호하려 한 것은 심각한 범죄 불감증이라는 비판을 자초했다. 과거 모레시계 검사로 날렸다는 홍 전 지사의 법의식이 어떤 수준인지를 적나라하게 들어 낸 경우라 하겠다.
선거 끝나면 색깔론 공세 앞세운 정치세력 '언제 그랬느냐'며 시치미 떼
18대, 19대 대선에서 그랬듯이 선거 과정에서 친북, 색깔론을 앞세웠던 정치세력은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의 태도를 보이면서 시치미를 뗀다. 선거전에서 공격했던 식의 반사회적 친북, 종북, 진보적 정치행위가 존재했다면 선거이후에 문제 삼아 법적 조치가 취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선거에서는 상대방을 악의 화신 정도로 공격하면서 전쟁 치르듯 하지만 선거 이후에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를 보일 뿐이다.
정치가 색깔론을 이용하는 식으로 자신의 언행에 대해 나 몰라라 하거나 부도덕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용인되는 현실은 국보법이 존재하는 한 쉽게 고쳐지기 어렵다. 대선에서 국보법이라는 무서운 독기를 약하게 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유권자에게 국보법의 영향을 능가하는 엄청난 감동을 주는 정치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이 있었다. 김대중, 노무현 당선이 그런 경우처럼 보였다.
오늘날에도 등장하는, 국보법이 뿌리인 종북 공세는 이른바 과거 북풍과 함께 수구 보수 세력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흉기다. 윤석열 정부 들어, 2019년 발생한 북한 어부 강제 북송 사건과 관련해 통일부가 당시 북한 어민들을 송환하는 현장을 찍은 동영상을 공개하면서 사건에 대한 입장을 180도 바꾼 것을 놓고 대통령실과 여당이 이 사건을 전 정부를 겨냥한 '종북몰이'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에 대한 논란도 근본적 원인의 하나는 국보법이라 하겠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원인은, 대다수 국민이 장기간 국보법의 독기에 중독된 나머지 자신이나 사회가 이 법으로 인해 얼마나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는지 조차 인식치 못한다는 현실이 악용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람이 호흡을 할 때 산소를 평소에 의식치 못하듯 이 나라 국민은 일상생활에서 국가보안법의 테두리에 갇혀 살면서 그 폐해를 인식치 못하고 있어 정치세력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치를 선거나 현실 정치에서 이런 비극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 국보법 개폐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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