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965년 와츠 폭동의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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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LA시가 인종차별, 흑인 폭동의 진원지가 된 데는 1965년 '와츠(Watts) 폭동'의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까닭도 있다.
1930년대 대공황기의 폭동과 1935년 뉴욕 할렘폭동이 앞서 있었지만, 와츠 폭동은 규모와 양상, 인적·물적 피해 면에서 전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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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LA시가 인종차별, 흑인 폭동의 진원지가 된 데는 1965년 ‘와츠(Watts) 폭동’의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까닭도 있다. 1930년대 대공황기의 폭동과 1935년 뉴욕 할렘폭동이 앞서 있었지만, 와츠 폭동은 규모와 양상, 인적·물적 피해 면에서 전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뉴욕 할렘 맨해튼 지역의 한 가게에서 주머니칼을 훔친 16세 흑인 소년을 경찰이 죽였다는 소문으로 촉발된 할렘 인종폭동은 약 닷새간 이어졌지만 사망자는 흑인 3명(부상 100여 명)이었다. 하지만 1965년 8월 11일부터 엿새 동안 지속된 와츠 폭동 희생자는 34명(부상 1,032명)에 달했고, 그중 23명이 경찰과 주방위군에 의해 희생됐다.
와츠 폭동도 오해에서 비롯됐다. 음주 난폭운전으로 고속도로순찰대에 의해 체포된 만 21세 흑인 청년 프라이어(Marquette Frye)가 연행되던 중 어머니 등 가족이 나타나자 거친 저항을 시작했고, 구경꾼들이 몰려들면서 저항이 더 거세지자 경찰이 경찰봉으로 흑인 청년을 구타해 강제 연행한 게 ‘팩트’였다. 하지만 소문은 운전자 어머니와 과잉 대응에 항의하던 임산부까지 경찰에 의해 구타당한 것으로 번졌다. 그날 밤부터 시작된 LA 남부지역 흑인 폭동은 하루하루 확산됐고, 주지사가 휴가 중이어서 주방위군 투입도 늦어져 조기 진압에 실패했다. 폭동의 상처는 그 자체로 새로운 폭동의 이유가 된다.
LA 카운티 인구는 남부 흑인 유입으로 1940년 7만5,000명에서 1965년 65만 명으로 폭증했고, 흑인 대다수는 와츠 지구 등 남동부 슬럼가에 밀집해 있었다. 백인 거주지역에 비해 교육과 교통 등 모든 여건이 열악했다. 게다가 한 해 전 주의회가 인종 주거권 차별을 금지한 법률을 무효화한 게 실질적인 도화선이 됐다. 당시 LA의 가난한 흑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프라이어의 진실’이 아니라 인종차별의 현실이었고, 이후 LA 흑인들은 와츠의 희생자들을 기억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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