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엔 잠 못자요".. 폭우가 가장 먼저 덮치는 그곳, '32만 반지하집'

나광현 입력 2022. 8. 11. 01:00 수정 2022. 8. 11.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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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년 만 폭우, 반지하방 덮쳐 주거민 4명 사망
전국 32만7000가구 여전히 땅 밑에 살고 있어
재해 취약·환경 열악해도 '빈곤층 최후 주거지'
"대책은 항상 사후약방문, 사고 때만 반짝 관심"
10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한 반지하 집 바닥에 침수로 물에 젖은 가재들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널브러져 있다. 나광현 기자

“비가 쏟아지는 날엔 현관문을 열어놓고 잔다니까. 꼼짝없이 갇힌 그날만 생각하면…”

10일 경기 시흥시의 한 반지하 집에서 만난 임모(80)씨는 10년 전 기억을 털어놓으며 몸서리를 쳤다. 당시 중부지방을 휩쓸고 간 폭우로 집 안에 흙탕물이 허리까지 차올랐지만, 현관문은 수압으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임씨 옆엔 어린 손자, 손녀가 벌벌 떨고 있었다. ‘이대로 죽는구나’하던 순간, 이웃집에서 양수기로 물을 퍼 날라 겨우 목숨을 구했다. 고교생이 된 두 손주는 아직도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이번 폭우가 시작할 때쯤 급히 양수기를 얻어와 침수를 면했지만, 세 식구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115년 만 물폭탄에 "죽을 뻔했다" 곳곳서 아우성

임모씨가 사는 경기 시흥시 반지하 집 안은 침수에 대비한 흔적이 역력했다. 물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해 전선은 벽에 박힌 못에 걸려 있고, 콘센트도 최대한 높은 곳에 올려져 있다. 나주예 기자

115년 만의 ‘물폭탄’이 가장 먼저 집어삼킨 곳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보금자리였다. 8일 서울 관악ㆍ동작구에서는 각각 일가족 3명과 여성 한 명이 반지하 집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임씨는 반지하 생활 35년 동안 침수만 4번 겪었다. 하수구가 역류해 집안이 온통 배설물 천지가 된 적도 있었다. 침수 후 장판이나 벽에 스며든 악취는 2, 3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때문에 여름이면 24시간 ‘침수 대비’ 태세다. 누전에 대비해 모든 전선은 벽에 못을 박아 걸었고, 콘센트도 천장 가까이 붙여놓았다. 그는 “손주들이 이사가자고 조르지만, 내가 죽으면 아이들 먹고살 돈이 필요해서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서울의 반지하촌인 관악구 신림동 일대도 ‘전후 복구’ 현장을 보는 듯했다. 일가족 3명이 사망한 곳에서 불과 100여m 떨어진 곳에서 사는 박모(64)씨 부부는 “우리도 죽을 뻔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순식간에 물이 차올라 피아노 위에 겨우 두 다리만 놓고 버틴 끝에 119에 구조됐다. 기쁨도 잠시, 가내수공업으로 생계를 꾸리는 부부는 하룻밤 사이 주거와 작업 공간을 모두 잃었다. “자연재해는 하늘의 뜻이니 (세입자가) 알아서 하라”는 집주인 말은 가슴을 두 번 후벼 팠다.


반지하 96% 수도권 몰려... 빈곤층 '마지막 쉼터'

지하(반지하) 가구 점유 형태. 그래픽=신동준 기자

반지하 침수는 집중호우 때면 어김 없이 반복되는 ‘고질적’ 사회문제다. 이제는 진짜 정부가 대책을 내놔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끓고 있다. 서울시는 2010년 장마철 침수 피해가 잇따르자 저지대 주거용 반지하 신축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전국의 반지하 거주 가구는 30만 곳이 넘는다.

2020년 작성된 통계청 ‘인구주택 총조사’에는 32만7,000가구의 주거 형태가 (반)지하라고 나와 있다. 이 중 무려 96%(31만4,000)가 서울(20만1,000), 인천(2만4,000), 경기(8만9,000) 등 수도권에 몰려 있다. 반지하 집이 주거비가 비싼 수도권에서 궁핍한 가족의 마지막 쉼터인 셈이다.

장마철에만 반지하의 삶이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바퀴벌레와 곰팡이로 뒤덮인 열악한 환경 탓에 거주자들은 호흡기ㆍ피부질환을 달고 산다. 시흥시 대야동 반지하 집에서 5년째 살고 있는 정모(59)씨의 팔에는 벌레들이 물어 뜯은 흔적이 가득했다. 그는 “반지하로 이사온 뒤 전에 없던 피부병이 생겼지만, 병원 치료를 받은 적은 없다”고 했다.


대책은 늘 '흐지부지'... 전수조사조차 안 해

10일 경기 시흥시 대야동 반지하 집에 살고 있는 정모씨가 벌레에 물려 상처투성이가 된 두 팔을 내보이고 있다. 나주예 기자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 한국사회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대표해 ‘지옥고’라 불린다. 그중에서도 반지하는 더 소외돼 있다. 그래도 햇살은 볼 수 있는 옥탑방ㆍ고시원과 달리 잘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2019년 5월 영화 ‘기생충’이 화제가 되면서 잠시 주목받았지만 그때뿐이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은 “정부는 매번 비로 사람이 죽으면 대책을 내놓지만 잊혀질 만하면 늘 흐지부지된다”고 지적했다.

실태 파악을 정확히 해야 대책도 제대로 나올 수 있다. 반지하 주거공간의 △물리적 상태 △재해 취약성 수준 △점유자의 경제적 상황 등을 두루 감안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반지하 거주자의 70% 이상이 전세나 월세를 들어 사는 세입자인 만큼, 공공재개발 사업 등의 대안도 고려해 봄직하다.

일단 서울시는 주거용 지하ㆍ반지하 건축물을 없애겠다고 이날 발표했다. 침수 가능성을 불문하고 지하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시는 거주 중인 세입자가 나간 뒤 더 이상 주거용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비주거용 용도 전환을 유도하고, 건축주에게는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마련할 방침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번만큼은 임시방편에 그치지 않고, 주거 안정에 필요한 근본 대책을 세우겠다”고 강조했다.

나광현 기자 name@hankookilbo.com
나주예 기자 juy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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