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배우의 노동의 가치는 무엇으로 매겨지나요

한겨레 2022. 8. 10. 18:2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6411의 목소리]"너는 좋겠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 수 있잖아."
자주 듣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배우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열악한 현실을 견디다 보면 이 일을 선택한 내가 싫어질 때가 많습니다. 가장 낮은 연봉 랭킹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이 일은 꿈만 먹고 살기에는 너무 힘든 일입니다.
극단폼 창단공연 무대. 정부나 재단 지원금 없이 사비를 들여 단원들이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했다. 사진 조영근

조영근 | 극단폼 대표, 배우 겸 연출

연극 한편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작가, 연출, 배우를 비롯해서 조명, 무대, 의상, 분장 등등 전문분야 스태프까지 많은 이들의 전문성이 합쳐져 하나의 작품이 무대에 오릅니다. 물론 영상기록물, 사진은 남지만 극은 순간의 예술이기에 공연하는 그 시간이 지나면 우리 ‘직장’은 사라집니다. 농담처럼 ‘우리는 직업은 있지만 직장은 없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노동의 가치가 값으로 매겨지는 것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노동법 등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12년차 연극배우로서 겪는 소외에 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우선 계약 과정. 일반 출연자는 공연 연습 시작과 함께 바로 계약서에 서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명한 배우일수록 꼼꼼한 계약을 맺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프로덕션의 ‘배려’가 없다면 무명의 연극배우들은 계약서를 쓰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스태프는 계약서가 없는 게 더 당연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한 곳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내가 얼마를 받고 일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하다는 표현을 썼지만 꽤 많은 곳에서 그렇습니다.

“네가 얼마짜리 배우라고 생각해?”

동료 배우가 작품을 하자고 연락 온 선생님에게 출연료를 물어봤을 때 받은 질문이라고 합니다. 실제 아직도 무명 연극배우들이 급여를 물어보거나 계약서를 요구하면 불편해하고 불쾌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적은 돈을 감수하고도 활동하는 배우들로서는 김빠지는 현실입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바로 열악한 임금 조건입니다. 우선 공연 연습시간은 급여 지급 대상이 아닙니다. 보통 작품 하나를 준비하면 2~3개월 동안 하루 최소 4시간에서 8시간, 많게는 ‘텐 투 텐’이라고 종일 연습해야 합니다. 작품을 언제 시작할지, 상황이나 배역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고정적인 아르바이트를 잡기도 애매합니다. 작품 준비에 이렇듯 많은 연습시간이 필요하지만, 급여 지급은 실제 공연시간 기준이기에 연습 중간에 공연이 취소되거나 중단되면 연습시간은 헛일이 돼버립니다. 애초 공연자 출연료와 스태프 임금을 결정하는 기준은 공연시간만이 아니라, 그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이 포함돼야 합니다. 무대에 서는 시간은 2시간에 그칠지 모르지만, 그 2시간을 위해 한달, 두달, 석달씩 육체·감정노동을 하는 예술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연습시간과 준비시간을 포함해 시급을 계산한다면 최저임금 수준에도 못 미치겠지만 말입니다.

얼마 전 지방 한 재단에서 제작한 대형 뮤지컬에 참여한 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루 4시간 이상 연습하며 공연 준비와 공연까지 두달 반을 투자하고 100만원 남짓 출연료를 받았답니다. 공연·연습시간의 최저시급은커녕 연습실을 오가는 차비만 겨우 나오는 수준입니다. 연극판에는 말 그대로 ‘열정페이 문화’가 여전합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엔 갹출해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고, 경력이 적은 신인들은 무대에 설 기회를 얻기 위해 기꺼이 적은 급여만 받고 출연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무대에 설 기회를 얻기 위해 개인이 감수하는 부분이 정부나 재단의 지원금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은 문제입니다. 신진예술가, 청년예술가를 위한 지원사업이라며 공고가 뜨는데 액수가 대개 100만원, 200만원 수준입니다. 배우뿐 아니라 공연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스태프들에게 임금을 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입니다. 적어도 정책적으로 지원되는 지원금은 최저임금 등 기준에 맞춘 책정이 필요합니다. 연습실과 극장 대관 등 제작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대관비용을 지원해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공연 수입으로 나머지를 충당하면 되지 않냐고 하겠지만, 영세한 연극시장 현실은 그런 기대를 접게 합니다.

“너는 좋겠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 수 있잖아.”

자주 듣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배우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열악한 현실을 견디다 보면 이 일을 선택한 내가 싫어질 때가 많습니다. 가장 낮은 연봉 랭킹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이 일은 꿈만 먹고 살기에는 너무 힘든 일입니다. 개선을 위해서는 연극인들의 노력이 우선해야 합니다. 서로의 정당한 권리를 존중하고 선진적인 작업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자생적으로 생존하기 힘든 기초예술 영역인 만큼 정부의 현실적인 지원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연극이 가난한 예술이 아닌, 마음이 풍요로운 예술이 되길 바라며, 이를 위해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도록 보장이 이뤄지길 희망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