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비 없는 죽음

한겨레 2022. 8. 10. 18:2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숨&결]

게티이미지뱅크

[숨&결]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두시간 좀 넘게 기다렸을까. 할아버지의 휠체어를 밀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 담당 주치의에게 물었다. ‘할아버지가 얼마나 사실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호스피스 받는 것도 생각해야 할 것 같아서….’ 주치의는 퉁명스레 말했다. “할아버지는 호스피스 못 받아요.” 말뜻은 이러했다. ‘말기 암 환자가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려면 반드시 24시간 간병인이 필요하다. 간병비만 한달에 300만원 이상 든다. 할아버지가 그런 비용을 감당할 수 있겠냐’는 거였다. 가난에 대한 무례한 태도에 기분이 상했으나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나왔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할아버지의 통장에는 100만원도 채 들어 있지 않았다.

1인가구 한달 생활비가 132만원(2020년 기준)인 것을 생각하면 한국은 살아가는 데보다 죽는 데 더 많은 돈이 드는 사회이다. 국립암센터 보고에 따르면 2020년 한해 동안 암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 8만2204명이었지만 그중 23%만이 호스피스 서비스를 이용했다. 6만명 넘는 나머지 분들은, 장기가 타들어가는 것처럼 힘들다는 암성 통증을 어떻게 견디고 죽음을 맞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중 상당수가 간병비라는 장벽을 넘지 못해 호스피스를 포기했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죽는 건 무섭지 않아. 이 상태로 오래갈까 봐 걱정이야.”

할아버지는 점점 기운이 없고 통증이 심해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입맛을 잃었다. 겨우 물만 마셨고 그날도 온종일 소변 한번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다시 방문진료센터로 돌아가려는 나를 붙들고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밥은 먹고 가.”

할아버지와 헤어지고 병원 입구 언덕길을 내려오다 안간힘을 쓰며 휠체어를 붙들고 내려가는 할머니 한분을 만났다. 중심을 못 잡아 뒤뚱거리는 휠체어에는 깡마른 할아버지가 타고 있었는데 입원 안내서를 쥐고 있는 손가락 모양이 특이했다. 곤봉 손가락이었다. 폐암인가 싶었다. 도와드리겠다 하고 할머니 대신 휠체어를 붙들고 내려가면서 어디 가시냐 여쭤봤다. 할아버지가 오늘 입원해야 하는데 입원 전에 좋아하는 갈비탕 한그릇이라도 먹게 하고 싶다 했다. 내리막길을 내려가 신호등을 건너고 다시 오르막길을 올라 주택을 개조한 식당에 겨우 도착했다. 문 앞에서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데 문득 식당 안채에 놓인 계단 세개가 보였다. 멈칫했지만 결국 등을 돌리고 나왔다. 입구에서 식당 주인을 부르던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둘러업고라도 식당 안으로 들어갔을까. 돌아오는 내내 그 계단 세개가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만약 나를 가장 비참하게 하고 싶다면 밥벌이도 힘겨워하는 내 가족에게 간병비를 감당하게 하라. 만약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고 싶다면 암덩어리가 내 살을 좀먹는 말기 암의 고통 속에서 간병비 때문에 호스피스에 입원하지 못하고 요양원을 전전하게 하라. 만약 내 삶을 끝내 고통으로 기억하며 이 세상을 떠나게 하고 싶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호스피스 병동을 줄이고 있는 정부를 그냥 방관하라. 그리하면 나는, 우리는 분명 통한의 눈물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그리하라.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죽을 것이다.”

방문진료를 시작한 이후 이런 죽음의 과정이 벌써 몇번째인가 세어보던 그날 밤. 잠자리에서 뒤척이던 내게, 이리 말하는 듯한 어르신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암환자 가족들이 수없이 들었을 목소리,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무력하게 바라봐야 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던 나는 그날 이후 할아버지의 간병비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 한통이 왔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공사 과장이었다. 회사 직원들이 기금을 모아 할아버지의 간병비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달밖에 지원해드리지 못한다며 미안해했다. 기뻤다. 그날만큼은 곤봉 손가락을 지녔던 할아버지와 그의 가족들 앞에 나타날 계단들도 아른거리지 않았다. 적어도 그날만큼은.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