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한국마라톤 쾌거 되돌아보는 8월9일 [이종세 칼럼]

이종세 입력 2022. 8. 10.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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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손기정, 1992년 황영조 올림픽 우승
손기정 탄생 110주년 기념 자서전 재출간 화제
답보상태인 한국마라톤 현실은 안타까운 상황

앞으로 며칠 뒤엔 어김없이 8.15 광복절이 찾아온다. 8.15만큼은 아니지만 8월9일(한국시간 10일)도 한국마라톤계에는 의미가 남다르다. 이날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2002년 작고)이 우승했고 56년 뒤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황영조(52‧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기 때문이다. 8월9일은 또 미국이 1945년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 엿새 뒤 일본의 항복을 끌어낸 날이기도 하다. 손기정의 올림픽 우승과 9년 뒤 일본의 패망, 황영조가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森下廣一‧55)를 따돌리고 일궈낸 몬주익 언덕의 쾌거. 해마다 한국마라톤을 되돌아보게 하는 8월 9일은 극일(克日)의 상징이기도 하다. 더욱이 손기정의 자서전‘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이 그의 탄생 110주년을 기념, 9일 재출간돼 화제다. 이 책은 1983년 처음 나왔으나 곧 절판됐고 2012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모교 서울 양정고 동문회가 재출간했는데, 10년 만에 내용을 보완해 이날 선을 보였다. 증보판은 손기정의 외손자 이준승(55)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이 쓴 회고 형식의 글이 새로 실렸다.

손기정, 36년전 인터뷰에서 “집안청소로 일과 시작”

베를린 올림픽에서 1936년 8월9일 금메달을 딴 손기정은 시상대에서 월계수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린 채 고개를 숙였다. 사진=휴머니스트 제공
36년 전인 1986년 8월 초순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로서 육상담당이었던 필자는 이광석 체육부장으로부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제패 50주년을 맞아 손기정옹을 인터뷰하라”를 취재지시를 받았다. 당시 74세였던 손옹의 자택은 서울 반포 고속터미널 인근 은방울아파트로 기억된다. 필자는 손옹이 필자의 가친과 동갑이어서 아버지를 대하는 것처럼 예의를 갖추었고 손옹 역시 일본에 사는 아들과 필자가 동갑이라며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인터뷰를 시작하자 하얀 모시옷 차림의 손옹은 필자에게 “하루 일과는 집 안 청소로 시작한다”고 운을 뗀 뒤 반세기 전 ‘영광의 순간’을 또렷이 회억(回憶)해냈다. “전 대회(1932년 LA 올림픽)에서 우승했던 아르헨티나의 후안 사발라가 마지막까지 따라붙어 애를 먹었지. 그러나 당시 비공인 세계기록(1935년 11월3일‧2시간26분42초)을 갖고 있던 내가 질 수는 없었어,”

기록에 따르면 손기정은 이날 막바지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사발라를 추월한 뒤 그대로 메인스타디움에 들어와 2시간29분19초2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손기정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손기정은 국제 대회에 참가할 때 팬들에게 ‘KOREAN’ 국적을 적은 사인을 선물했다. 사진=휴머니스트 제공
손기정은 56년 뒤인 1992년 8월9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황영조를 포옹하며 “네가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나의 소원을 풀어주었다,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때 그의 나이는 80세. 그리고 10년 뒤인 2002년 11월15일 타계해 대전현충원에 묻혔다.

‘무명’ 황영조 올림픽 우승은 아무도 예측 못해

현지시간 1992년 8월9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메인스타디움 결승선을 향해 역주하는 황영조. 사진=대한육상연맹 제공
비공식이지만 세계기록 보유자였던 손기정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우승은 예측할 수 있었던 반면 황영조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마라톤 우승은 의외의 결과였다, 코오롱 소속으로 21세의 풋내기였던 황영조는 1991년 동아마라톤에 페이스메이커로 참가, 3위를 한 것이 계기가 돼 그해 7월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나가 우승했으나 그가 1년 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승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황영조는 1992년 2월 일본 벳부~오이타마라톤에서 2시간 8분 47초의 한국 최고 기록으로 2위를 해 6개월 뒤 바르셀로나 올림픽 국가대표로 확정됐지만, 여전히 올림픽 우승 후보 반열에는 오를 수 없었다. 당시 세계마라톤 최고 기록은 에티오피아 벨라이네 딘사모의 2시간6분50초로 황영조의 기록과는 2분 정도의 격차가 있었고 2시간 7분대 선수가 수두룩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92년 8월9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폐회식 몇 시간을 앞두고 열린 남자마라톤에서 황영조 김재룡(56‧한국전력 감독) 김완기(54‧삼척시청 감독)에게는 “운이 좋아 동메달만 따내도 성공”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따라서 국내 언론들도 한국시간 8월10일 새벽 3시에 열리는 남자마라톤에 비중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동아일보는 “혹시 모른다. 만일 한국 선수가 우승하면 1면과 사회면 머리기사는 물론 관련 기사를 완벽하게 준비하자”며 철야 근무로 대응했다. 경기 스트레이트와 우승선수 가족 인터뷰만 남겨놓고 한국마라톤 역사, 최고 기록 변천사, 동아마라톤이 한국마라톤에 끼친 영향, 한국 선수 우승을 전제로 한 인기 작가의 기고 등 10여 건의 기사를 모두 제작해 만반의 준비를 한 뒤 TV 중계를 지켜봤다. 결과는 우승이었다. 더위와 언덕에 강했던 황영조가 레이스 막판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타와 독일의 트로이캉을 따돌리고 2시간 13분 23초의 기록으로 메인스타디움 결승선을 1위로 통과한 것. 당시 동아일보는 24개면 가운데 12개 면을 황영조 우승 관련 기사로 채웠다. 4개 면밖에 할애하지 못한 경쟁지들과 비교가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강원도 삼척 황영조 기념공원에 세워진 바르셀로나 올림픽 제패기념 조형물. 사진=황영조 기념공원 제공
황영조 우승을 계기로 동아일보는 1993년 1월부터 황영조 올림픽 제패 기념, 마라톤 발전기금 모금 캠페인을 벌였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금일봉을 보내자 각계의 성금이 답지했다. 물론 동아일보와 황영조도 솔선해 거액을 쾌척했는데 이때 조성된 발전기금으로 동아마라톤 꿈나무재단은 현재도 매년 중고교 육상 유망주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횡영조의 올림픽 우승 때문에 가능했다.

“아 옛날이어” 과거 영광 언제나 되찾을까

하지만 한국마라톤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세계 정상과는 거리가 너무 멀고 그나마 기대할만한 유망주도 보이지 않는다. 케냐의 귀화 마라토너 오주한(34‧청양군청‧최고 기록 2시간5분13초)은 지난해 도쿄올림픽에 이어 지난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미국 유진) 남자마라톤에서도 중도 기권해 퇴출 위기에 몰렸다. 그렇다고 순수 토종 한국 선수 가운데 오주한을 대체할만한 기대주가 있는 것도 아니다. 2000년 2월 이봉주가 수립했던 2시간7분20초의 한국기록은 22년째 깨지지 않고 있으며, 풀코스를 2시간 10분 이내에 주파하는 선수가 1명도 없다. 2시간 4분대를 달리고 있는 일본과의 격차도 크기만 하다. 2018년 서울국제마라톤 겸 제89회 동아마라톤에서 김도연(29‧당시 K-water)이 한국기록을 경신했던 여자마라톤 역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한국마라톤에도 남자 높이뛰기의 우상혁 같은 슈퍼스타가 나올까.

이종세(용인대 객원교수‧전 동아일보 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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