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띠동갑 언니가 다시 읽은 '82년생 김지영'

성지연 에세이스트, 국문학 박사 입력 2022. 8. 1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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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과연 허구의 소설인가. 자주 이런 생각을 하며 읽었다. 소설가 조남주가 2016년에 발표한 '82년생 김지영’ 말이다. 소설을 읽으며 지나온 내 삶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1982년생이면 나보다 열두 살 어린데도 어느 한 부분 공감 안 가는 데가 없었다. 내가 겪었던 일들을 김지영 역시 마주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생전 처음 겪는 낯선 일이 너무 많았다.

소설은 그렇게 닥치고서야 아는 일들을 김지영의 생애를 통해 여섯 개의 시간대로 나눠 조목조목 정리한다. 여성학자 김고연주는 해설(解說)에서 특수성이 아닌 보편성을 추구하는 게 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썼다. 정말 그랬다. 주인공 김지영은 독특한 개인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생애주기마다 맞닥뜨리는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는 보편적 개인이다.

해외에서도 많은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82년생 김지영’은 2016~2020년 해외에서 가장 많이 팔린 한국 문학 작품이다. 10개 언어권에서 30만 부 이상 팔렸고, 이 중 20만 부는 일본 독자들의 선택을 받았다.

여자들이 모두 동일한 일을 겪고 자라진 않는다. 1970년생인 나와 1982년생인 김지영 간에는 12년의 시간 차가 있다. 그리고 지금은 2022년, 아직도 수많은 '김지영’들은 그와 같으면서도 다른 일들을 겪을 것이다. 이 소설은 1982년생을 특정해 한국 사회 여성의 삶에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여자’라는 꼬리표

1980년대로 돌아가 보자. 여성은 태어나기 전부터 차별을 겪었다. 1970~80년대를 거치며 성감별과 여아 낙태로 성비 불균형이 심각해졌다. 불균형에는 죽음이 동반된다. 김지영과 그의 언니를 낳은 어머니는 남자아이를 낳으려 배 속 셋째 여자아이를 낙태했다. 막내는 남자아이였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김지영이 초등학교를 다녔을 때 전국에서 여자 반장은 절반이 되지 않았다. 1970년생인 나는 남학생 중에서만 반장을 뽑는 투표를 했다.

"이제 여자니까 공부를 못하거나 덜 배워도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없는 듯했다. (중략)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이면 '여자’라는 꼬리표가 슬그머니 튀어나와 시선을 가리고, 뻗은 손을 붙잡고, 발걸음을 돌려놓았다."

그래도 세상은 변했다. 김지영의 어머니는 초등학교만 마치고 공장에 다니며 오빠들 뒷바라지를 했다. 외삼촌들이 번듯하게 자라도록 돕고 나서야 어머니는 중학교 졸업장을 받고 검정고시로 고졸 학력을 얻었다. 김지영의 언니가 대학 진학을 계획할 때는 어머니 같은 희생을 요구받지는 않았다. 다만 어머니는 교대를 권했다. 등록금이 싸기도 했지만 애 키우기 좋은 직장이라는 게 이유다. 외환위기로 공무원인 아버지의 일자리가 불안하고 어린 동생이 둘이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언니의 꿈은 PD였고 관련 학과로 진학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여자라서 못 할 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사회 분위기였다. 결혼하고 아이 낳는 걸 고려하지 않던 언니는 어머니의 조언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펄펄 뛰던 언니는 결국 교대에 들어갔다. 1990년대 후반의 일이다.

‘82년생 김지영’에 나오는 인물들은 보통 사람들이다. 욕망으로 달려가다 자신의 삶을 파괴하지도, 세상과 불화해 보통 사람의 삶의 경로에서 벗어나지도 않는다. 그때그때 자신의 욕망과 세상의 요구를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하는 순한 사람들이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꾸려나간다.

김지영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 동기들과의 임금격차와 업무 차별에 당황했지만 어렵게 취직한 회사에서 열심히 일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시어른들이 아이를 낳을 것을 압박했다. 출산을 생각하자 직장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 아이는 어떻게 돌볼지 고민이 시작됐다. 남편과 상의해봤지만 뾰족한 답은 없었다. 아이를 낳기로 했다. 출산을 앞두고 회사를 그만뒀다.

김지영은 남들처럼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고비마다 생전 처음 겪는 어려움을 맞닥뜨려야 했다. 모든 일은 여자이기 때문에 더 어려워졌다. 그래도 어떻게든 보통 사람들이 가는 삶의 경로를 뚜벅뚜벅 걸어가려고 했다.

그러던 김지영이 깜빡깜빡 정신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친정어머니의 말투로 남편을 '정 서방’이라고 불렀다. 남편의 전 여자 친구 말투로 아이 키우느라 힘든 지영이에게 잘해주라고 말했다. 추석에 시댁을 방문해서는 시어머니를 '사부인’이라 부르며 항의하는 말을 쏟아냈다.

모든 게 여자라서 벌어진 일이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결과라면 감수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성별은 존재의 문제다. 그냥 여자로 태어난 것에 무슨 이유가 있을까. 억울한 일들이 쌓이고 쌓이다 임계점을 넘어버렸다. 그간 쌓인 말을 제정신으로 토해내는 건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하지 못한 말들을 쏟아낸다.

어쩌면 제정신은 자신을 버리는 쪽에 있다. 아내, 엄마, 며느리라는 역할이 옴짝달싹 못 하도록 삶을 죄어왔다. 타인의 목소리를 빌려서라도 이 장애물들을 넘어서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임신한 뒤 계속 다니고 싶은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김지영을 지켜보는 마음이 참 좋지 않았다. 차별 속에서 공부를 하고 취업을 하는 데까지 어떻게든 도달한 여성이 결혼과 출산, 육아의 시기를 지나며 사회에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내 세대에게 익숙한 일이 여전했다.

어떻게든 될 줄 알았던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아이가 자라려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고, 대개 여자라는 이유 하나로 아내에게 그 의무가 떨어진다. 김지영이 아이를 데리고 카페에 갔다가 들었던 '맘충’ 같은 혐오 표현은 돌봄 노동이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아이를 키우며 사회생활을 하는 것도 가시밭길이고, 사회에서 퇴장해 살림과 육아를 전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대! 막 나대!"

사회생활을 하다 그만둔 여성을 경력 단절 여성이라고 부른다. 내 경우 처음엔 몇 년 아이만 키워놓고 다시 사회로 나갈 결심을 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한번 시작한 돌봄에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했다. 다른 대안이 없을까 여기저기 기웃거려보았지만, 언젠가부터 그것도 포기했다. 가사와 육아라는 게 쳇바퀴 도는 일이라 일상은 점차 지루해지고 삶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1982년생 김지영은 나보다 12년이나 젊다. 나의 세대보다는 좀 나아졌으면 좋았을 텐데 출산과 육아라는, 김지영이 마주한 현실은 별 차이가 없었다.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은 현재진행형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경제 참여율은 M 자 모양을 보인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여성 고용률은 25~29세가 70.9%, 35~39세가 57.5%, 50~54세가 67.1%다. 20대 후반까지는 남성(66.4%)보다 근소하게 높다가 35~39세엔 남성(90.7%)보다 크게 낮아진다. 출산과 육아가 큰 영향을 미친 결과다. 2020년 조사한 여성 경력 단절 사유 1위는 육아(43.2%)이고, 그다음으로 결혼(27.3%)과 임신 및 출산(22.1%)이 뒤따른다.

여성 경력 단절 문제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심각한 수준이다. 우리나라 30~40대 여성 고용률은 2019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중 31위다. G5(미국·일본·독일·영국·프랑스)의 경우 여성 고용률이 20~40대까지 증가하다 50대에 들어서야 감소하는, '뒤집어진 U(∩)’ 자 형태를 보이는 것과 큰 차이다.

개인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이를 뛰어넘기란 어렵다. 출산과 육아로 문제를 좁혀보면 일단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더 중요한 건 남녀평등 문화의 정착이다. 걱정스러운 건 이런 주제가 나올 때마다 펼쳐지는 남녀 대결 구도다. '82년생 김지영’은 많은 독자들이 읽는 베스트셀러였지만 일부 남성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몇몇 여자 연예인들은 이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무분별한 혐오에 시달리기도 했다.

남녀평등 문제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김지영을 돕는 게 남편 정대현에게서 무언가를 뺏는 게 아니다. 김지영의 괴로움은 정대현의 괴로움이기도 하다. 아내가 괴로우면 남편도, 엄마가 괴로우면 아들도, 딸이 괴로우면 아버지도 괴롭다. 여자가 괴롭다는 게 남자가 괴롭지 않다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다. 당연히 남자도 이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들다. 남자와 여자 중 누가 더 억울한가를 따지기보다는 남녀 다 같이 잘 살아가기 위한 길을 찾는 편이 낫다.

김지영을 치료한 정신과 의사는 능력 있는 안과 전문의였던 아내가 아이를 키우느라 일을 그만둔 걸 안타깝게 생각했다. 어릴 적 수학 영재였던 아내는 초등학교 수학 문제집을 잔뜩 푸는 데서 뜻 없는 성취감을 얻고 있었다. 정신과 의사는 아내와 김지영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아를 실현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동료 상담사가 임신 때문에 일을 그만두자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보겠다고 결심한다. 현실은 언제나 마음을 배반한다.

아내와 김지영을 이해하지만 왜 그의 공감은 여성 일반에게로 확대되지 않는 걸까. 만약 부부가 공동으로 출산과 육아를 감당하고 그로 인한 손실은 국가가 충분히 보조를 해주면 어떨까. 다음 세대를 계속 낳고 길러야 사회가 유지될 테니 고용주들이 고용인들의 출산과 육아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자각을 갖고 실천하면 어떨까.

"당신은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고리타분한 소릴 하고 있어? 지영아, 너 얌전히 있지 마! 나대! 막 나대! 알았지?"

김지영의 아버지가 김지영에게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라고 하자 어머니는 숟가락으로 식탁을 내리치며 이렇게 소리친다. 이건 딸이 아니라 자신에게 전하는 말이다. 방직공장을 다니며 오빠들의 학비를 댔던 어머니다. 언젠가부터 어머니는 참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에서 절반의 성공을 어머니에게 돌리는 아버지에게, 못해도 자신이 7이고 남편이 3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김지영을 적극적으로 응원한다.

김지영은 살아오며 많은 여자들의 응원을 받았다. 학원에서부터 김지영을 쫓아오던 남학생이 외진 정류장에서 따라 내렸다. 김지영은 겁이 났다. 버스에 함께 타고 있던 모르는 여자가 급하게 내려 김지영을 도와줬다. 아버지는 그런 일이 김지영에게 문제가 있어 발생한 거라고 야단쳤다. 여자는 김지영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며 위로했다.

입사한 직장의 여자 팀장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커피를 타고 식당에 가면 숟가락을 놓아주는 김지영에게 여자 신입 사원이라고 해서 그런 일까지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팀장은 관리 직급이 된 후 여자 직원들의 출산 및 육아 휴가까지 보장했다. 알찬 응원이었다. 팀장은 퇴사하는 김지영에게 나중에 꼭 같이 일하자는 말도 잊지 않았다.

공감과 체험에서 나오는 응원이다. 나 역시 응원을 보낸다. 그러다 드는 생각은 여자들만의 응원이 아니라 더 많은 남자들의 응원이 필요하다는 거다. 마음의 응원이 아니라 실천의 응원 말이다. "얌전히 있지 마! 나대! 막 나대!" 어머니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많은 아버지가, 남편이, 아들이 이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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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연의 다시 만난 그녀들
1970년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양한 글쓰기를 하는 전업 에세이스트로 살아가고 있다.

사진출처 다음영화 민음사블로그

성지연 에세이스트, 국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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