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리산 레인저] 탐방객이 남긴 음식 먹었던 그때 그 대피소

조형구 함양분소장 2022. 8. 10.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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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대피소 발령
아름다운 겨울 장터목 대피소.

신규 임용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그 주는 유난히 추웠다. 행정, 전산, 법규, 공원 관리 기초 등 실내 교육을 받고, 기본 체력향상과 지리·지형 숙지를 위한 북한산국립공원 종주산행을 했다.

실내 교육 후 28명의 동기들과 함께 북한산으로 향했다. 공단에서 지급한 고어텍스 점퍼, 등산화, 장갑, 아이젠을 착용했다. 날씨가 유독 추워 내리는 눈은 곧장 얼어붙었고, 눈보라가 얼굴과 귀를 때려 아플 정도였다.

하필 여자 동기 한 명이 쓸 아이젠 1개가 부족했다. 이미 아이젠을 착용한 다른 남자 동기들은 누구 하나 내걸 쓰라고 나서지 않았다. 추운 날씨에 처음 하는 겨울 산행이라 겁이 나서 선뜻 나서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 순간 무슨 배짱이 생겼는지, 또 무슨 산행 자신감인지 내가 나섰다. 교관과 동기들에게 "내가 안전하게 책임지고 아이젠이 없는 동기를 데리고 산행하겠다. 대신 아이젠은 내가 착용하고 가겠다"고 말했더니 우레와 같은 박수와 응원이 되돌아왔다.

교육담당관은 동기들의 산행 수준을 고려해 백운대코스를 산행코스로 잡았던 것 같다. 내 기억으로는 도선사~백운봉 암문~백운대~북한산성~북한산성분소로 하산하는 코스였다.

산행 내내 여자 동기 손을 꽉 잡고 걸었다. 백운대 정상은 물론, 하산해 탐방지원센터까지 시종일관 혹여 넘어질까 세심하게 신경을 쏟아 부으며 완주했다. 신사다운 매너와 경상도 사나이의 책임과 의리를 끝까지 보여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산행을 마친 후 얼핏 살핀 동기들의 눈치가 '둘이 사귀겠네. 잘해봐'라는 듯, 또 무사히 안 넘어지고 하산한 게 대단하다는 동경인 듯 싶었다. 사실 나의 괜한 호들갑일 수도 있다.

모든 교육과정이 끝나고 희망근무지 설문에 지리산을 선택하고 지급받은 근무복, 교육교재 등 짐을 챙긴 후 교육장을 빠져 나왔다. 동기들은 각자 선택한 공원으로, 또 집으로 향했다. 고향집으로 내려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라 동기들과 함께 하룻밤을 머물고 다음날 덕산으로 내려왔다.

지리산 천왕봉 일출.

첫 출근부터 고난길

희망대로 지리산에 발령을 받았다.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에 첫 출근을 하고 관할 분소와 공원관리 현황, 행정, 지형 및 지리, 직원과의 인사 등 수습기간 1주일 교육을 받았다. 그런 후 중산리분소(현 산청분소)로 발령 받아 지역 이장과 인사를 나누고 공원구역 파악, 담당구역 순찰, 국립공원 입장료 징수, 국립공원 지도 판매, 고로쇠 수액채취 허가지 확인, 인허가지 점검 주차 요금 및 수입금 관리 등 업무를 했다.

내대, 거림, 청학동, 중산리 일원이 분소 관할이라 삼신봉三神峰 터널 인허가, 청학동靑鶴洞 내 공사 인허가, 고로쇠 채취협약, 훼손지 복원, 야생동물 밀렵단속, 불법 엽구류 수거, 모니터링, 쓰레기 수거 및 분리, 집하장 정리, 계곡 내 불법 야영, 무속행위 단속, 무질서 상행위 단속, 탐방객 안전산행 계도, 야간 숙직 등 초창기에 수많은 일들이 부여돼 정신이 없었다.

수습기간 3개월을 보낸 뒤 다시 나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대피소인 지리산 장터목대피소(1,750m)에 발령을 받았다. 장터목이라는 이름은 함양군 마천면 사람과 산청군 시천면 사람들이 물물교환의 장이 섰던 장소에서 유래되었으며, 세석분소(세석대피소) 관할인 대피소다.

중산리분소에 근무 중이었기에 우선 전화로 세석분소장에게 인사했다. 이후 전화를 건네받은 분소 직원이 "잘 쉬고 세석분소에서 정식 인사 및 업무분장도 하고, 간단하게 교육도 받아야 하니 장터목으로 가지 말고 세석대피소로 올라오라"고 했다.

그때 나는 신규 임용 전에 샀던 50리터 배낭이 좀 작은 것 같아 진주 시내 중앙시장에 들러 80리터 배낭을 샀다. 근무복과 속옷, 여분의 체육복과 등산복, 감기몸살 약, 파스, 점퍼 등을 넣고 여기에 생필품도 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엔 근무기간이 길었다. 한 달에 5일 정도 쉬었다. 그래서 근무하는 동안 먹을 물품을 휴무자가 장을 봐서 출근 날 배낭에 넣고 올라가야 했다. 대피소 직원은 "무 2개, 삼겹살, 소고기, 양파, 달걀, 대파, 만두를 사오라"고 했다. 나는 여기에 내가 먹고 싶은 과자까지 사서 알차게 배낭에 담았다.

대망의 출근 날, 하필 덕산에는 장대비가 왔다. 온통 안개가 자욱했다. 평소에는 멀리 천왕봉도 선명하게 보이는데 비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보여서 부모님이 많이 걱정했다. 그러나 "국립공원 직원이라면 무조건 세석대피소로 올라와야 한다"고 하니 도리가 없었다. "비가 개이면 다음날 올라가라"는 부모님 만류에 "일단 올라 가야 한다"고 대꾸하니 조심히 잘 다녀오라고 배웅해 주셨다.

제설도 탐방객 안전을 위해 공단 직원이 해야 할 업무 중 하나다.

오랜 기간 산을 안 탔지만 그래도 아직 젊고, 시골 촌놈이라 기본 운동신경은 남아 있었기에 비가 와도 가보자 생각하면서 덕산서 내대 거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내대쯤 오니까 비가 진눈깨비로 변해 내리고 있었다.

거림버스정류장에서 배낭을 챙겨 하차했다. 거림 입구에서 거림탐방지원센터까지 가는데 꽤 멀었다. 산불방지기간이라 탐방객, 등산객 없어서 그런지 더 적막하고 혼자 6km를 산행하는 게 조금은 겁이 났었다.

갑자기 산행하는 거라 조금 숨이 차고 힘들었다. 음료수도 마시고 초코바도 먹으면서 체력을 보충했다. 배낭이 꽤 무거워 진눈깨비 맞고 추운데도 땀이 많이 났었다. 조금 쉬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추워서 오래 쉬지 못하겠기에 힘들어도 계속 산행을 했다.

북해도교北海道橋(일본 북해도, 마치 홋카이도처럼 이곳을 기점으로 기온 차이가 난다 해서 명명했다고 한다)에 도착하니 이제는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려 탐방로가 아예 잘 보이지 않았다. 눈도 많이 와서 내 무릎까지 쌓여 어느 곳이 길인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소름이 조금 돋았다. 날개이정표는 세석대피소까지 2.8km라 한다. 일명 깔딱고개라 부르는 가파른 언덕길이다.

숲 속은 어두컴컴하고 위험해 보여 그냥 내려갈까 생각하다가 혹시 내가 안 가면 부식이 없어 직원들이 식사를 제대로 못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래서 '가는 데까지 가보자' 싶어 무작정 예전에 가 봤던 기억을 되새겨 따라갔다.

거림~세석 구간은 10대, 20대 때 다녔던 곳이고, 산길지형도 대충 볼 줄 알아 멀리 쳐다보고 길을 안전하게 살피면서 올라갔다. 눈을 잘 못 밟으면 바위와 바위 틈 사이로 발목이 들어가서 잘못하다가는 골절상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천천히 확인하고 걸었다.

두 번째 깔딱고개도 넘고 남해 삼천포 전망대를 지나자 마침내 세석대피소다. 무사히 잘 찾아왔다는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 자대 배치 받은 신병의 자세로 근무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생겨 계속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뛰었다.

도착하니 또래 직원의 첫 마디가 "진짜 올라 왔네?"였다. 뒤이어 "산에 안 오고 그만 둘 줄 알았다"고 덧붙인다. 나는 속으로 '이게 무슨 말이지? 젊은 직원들이 많이 그만 두는 모양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신입이 왔다고 따뜻한 믹스커피를 내어 준다. 짊어지고 온 배낭을 정리하고 다시 대피소 사무실로 갔다. 분소장님께 전입 인사를 하며 살아온 얘기, 공단에 들어오게 된 계기 등을 말했다. 이후 공원 현장관리 방법에 대해 듣고, 대피소 화장실 시설물, 취사장, 기계 발전실 등을 둘러보았다. 당시 분소장님이 현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장님이다.

춥고 힘들게 산에 올라와서 그런지 몸이 욱신거렸다. 잠시 휴식을 취하니까 금방 어두워졌다. 직원들과 같이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피곤해서 일찍 잠을 청했다.

세월과 바람을 견디다 못해 탐방로 위로 쓰러진 나무도 공단 직원이 베어 치운다.

'잔반 저장'하는 대피소 직원들

다음날 아침, 어제 올라오면서 비 맞고 눈 맞으며 산을 타서 그런지 자고 일어났지만 몸이 쑤셨다. 아침을 먹고 세석대피소 직원과 인사를 한 후 나는 장터목대피소로 향했다.

세석에서 장터목까지는 3.4km다. 바람이 조금 불었지만 혼자서 겨울 설경을 보며 산행하니까 온 세상이 다 내 것인 듯, 나 혼자만의 길인 듯 눈길을 걸으니까 오묘하고 설렘 그 자체였다. 촛대봉에서 바라보는 세석대피소 일원 세석평전은 내대 청학동 방향으로 푹 꺼진 습지로 정말 온화해 보였다. 겨울인데도 연하선경의 눈밭이 너무너무 멋있어서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일출봉 출입금지 안내간판을 보고 조금 내려가니 드디어 장터목대피소가 나를 반겼다. 능선이라 그런지 바람이 매서워 세석과는 또 다른 대피소라는 느낌을 받았다. 과연 우리나라 최고最高 대피소이자 천왕봉 지킴이 역할을 하는 대피소다운 풍모라 생각되었다.

이곳 역시 산불방지기간이라 탐방객이 전혀 없었다. 당시 산불방지기간에는 야생 동식물 보호, 자연보전, 각종 시설물 보수 등을 위해 입산을 금지해서 등산을 할 수 없었다.

성수기 때 대피소 헬기장 한쪽에 저장해 둔 각종 쓰레기 마대를 천막에 풀어 헤쳐 종류별(캔, 플라스틱, 병, 비닐, 기타)로 구분해 마대에 담는 작업을 한다. 마대에 담은 쓰레기는 안전 로프로 잘 묶어서 헬기로 안전하게 하산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대피소 직원들이 마대 속 탐방객이 먹고 남긴 쌀과 김치 등 깨끗하게 밀봉된 음식은 따로 모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할까?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미개한 짓이다'란 생각이 들었지만, 이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당시에는 지원도 부족했고, 또 지금과 다르게 주5일 근무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직원들의 근무 일수가 많아 생필품이 빨리 바닥이 난다. 그렇기에 중간 중간 음식이 부족할 때가 있었다. 성수기엔 탐방객이 짊어지고 온 음식을 해먹고 남은 쌀, 김치, 고기 같은 것을 하산할 때 본인들 배낭무게가 가벼워지니까 먹으라고 주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아예 부식을 적게 올리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러니 이 '잔반 저장'은 비상시를 대비한 자구책이었던 셈이다. 물론 지금은 거의 없어진 문화다.

대피소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이면 오늘은 천왕봉 방향, 내일은 세석 방향 이런 식으로 탐방로 계단 및 난간 보수, 오일스텐 작업, 목책계단 설치작업, 안내간판 및 현수막 교체, 보일러 수리, 엔진 점검, 화장실 정화조 작업, 산불감시 등 많은 일을 했다.

대피소를 방문한 탐방객들의 식사. 옛 대피소 직원들은 이들이 남긴 잔반 중 깨끗한 것들을 따로 챙겨두고 먹었다

산불방지기간에는 야간 순찰 및 불법산행 단속, 구조 대비 훈련으로 장터목에서 세석을 거쳐 벽소령대피소까지 산행을 한다. 장터목대피소에서 벽소령대피소까지는 9.7km다. 처음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지만 밤하늘 달과 별을 보면서 동료들과 산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젊은 구조대원에 뒤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하며 장터목에서 세석을 들러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벽소령까지 철야 산행을 하고 벽소령대피소에서 간식을 먹고 대피소 홀에서 잠을 청했다.

막상 걸을 땐 괜찮았는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무릎이 많이 아팠고,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등산화로 인해 발가락에 물집도 생겼다.

낮에 대피소 관리, 시설물 점검, 저녁에 야간 순찰 등 이런 생활의 연속에 정말 몸이 많이 지쳐갔다. 지금까지 학교생활과 도시 직장생활을 했었기에 이 모든 게 낯설고 문화충격 그 자체였다.

열심히 근무하고 나면 퇴근이 찾아온다. 교대 근무자가 올라오면 같이 식사를 하고 인수인계를 한 뒤 하산한다. 보통 장터목에서 유암폭포~칼바위~중산리로 내려가지만 날씨가 좋으면 천왕봉~법계사~중산리로 하산한다.

퇴근길에도 탐방로 쓰레기를 줍고, 시설물을 점검하며 만나는 탐방객에게 안전 산행을 당부하고 등산 코스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쓰레기를 줍는 건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하고 또 위대한 책무라고 생각해서 한 일이었다. 국립공원 1호 지리산을 찾은 탐방객들이 쓰레기에 눈살 찌푸리지 않고 힐링하고 간다면 그것이 내 자부심이다. 그땐 몰랐지만 이게 최근 유행하는 클린산행, 플로깅, 줍깅이었다. 왜 이걸 먼저 사회운동화하지 않았는지 아쉽다.

퇴근하면 언제나 동네 목욕탕에 들러 씻은 후 한의원이나 의원에서 한방 침과 영양제를 맞고 물리치료를 받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대피소로 출근하는 날이 다가오면 산에 올라가기 전에 미리 약국에서 붙이는 파스 20장과 감기약, 몸살약 등 비상구급약품을 사비로 구입하고 등산할 때 먹을 비상 간식과 근무하는 날 해먹을 부식을 구입해 둔다. 아픈 곳이 많다 보니 동료들은 나를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한의원에서도 "이렇게 몸이 아프면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게 어떠냐?"고 반 농담 반 진담으로 얘기한다. 그래도 나는 '내 고향 산을 내가 지킨다'는 자긍심과 힘들어도 스스로 이겨 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지리산이 돌봐준 마음

대피소 근무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것과는 완전히 패턴이 다른 삶이었다. 고향, 부모, 친구 모두와의 이별이었기 때문에 오로지 내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래서 천왕봉에 적어도 1주일에 세 번 이상 무조건 올라갔었다. 천왕봉에 오르면서 탐방로 청소도 하고 시설물 보수하고 저지대 산불감시도 했다.

천왕봉에 오르면 산 아래에 내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이 보인다. 덕산초등학교와 들녘이 보이고 또 날씨 맑은 날이면 통영 앞 바다 섬, 진주시내, 삼천포대교, 노고단, 월출산, 가야산, 덕유산도 보인다. 사방이 확 트이고 가슴이 시원해진다. 답답한 마음을 그렇게 지리산이 추슬러줬다.

월간산 2022년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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