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일관계의 시한폭탄 '혐한'
한 달 전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일본과 한국에서는 해당 소식이 대서특필됐고, 총격 소식과 동시에 ‘범인의 정체가 한국인’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삽시간에 일본에서 퍼져나갔다. 일본 당국의 그 어떠한 발표도 없었지만, 해당 소문은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 언론에서도 보도가 되었을 만큼 퍼졌다.
이후 DHC TV에서는 범행의 주요 원인이 된 통일교의 행사에 아베가 축전을 보낸 것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이를 종교와 무관한 평화운동 행사인 것처럼 속였기 때문”이며, “이 행사에 축전을 보낸 미국 대통령 및 다른 나라의 정상들까지 다 속은 것이다”라는 루머까지 생산하고 있었다. 마치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사건의 주요 발단이 되었던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퍼트렸다’라는 유언비어가 삽시간에 퍼진 것처럼 말이다. 이는 ‘혐오의 피라미드’ 1·2단계인 편견과 선입견을 방치했을 때 5단계인 집단학살로 이어진 역사적 사례다. 현재 한 나라의 지도자를 지낸 정치인을 외국인이 총격했다는 근거도 없는 소문이 사실처럼 보도되고 일본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삽시간에 퍼진 것은 그동안 지속되어온 혐한이 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혐한이 일본 일간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92년 3월4일 마이니치신문 기사였다. 이후 혐한은 시대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 일본 국민에게 노출됐다. 과거에는 종이로 만들어진 신문과 출판에 국한됐다면 최근에는 미디어를 포함하여 SNS와 유튜브로 혐한 콘텐츠가 진화됐다. 게다가 혐한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문화영역뿐만 아니라 정치로도 진출했다. 일본 우익 정치권과 결탁한 그들은 세력을 더욱 조직적으로 확장해나갔으며, 제도권으로 진출했다. 주요 사례로 일본의 대표적인 혐한 작가 햐쿠타 나오키가 있다. 그는 아베 전 총리와도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아베 정권 시절 일본 국영방송인 NHK에서 요직을 맡기도 했다.
최근에는 단순히 정치권과 결탁하는 수준을 넘어 혐한 세력들 스스로 정치권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극우 정당인 일본유신회와 참정당은 중의원과 참의원을 추가 배출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참정당의 경우 외국인 고용 반대 등을 주장하는데도 젊은층의 지지를 얻어 원내 진출에 성공했다.
혐한은 더 이상 일부 극우 인사들만의 발언으로 치부하기에는 위험한 수준이다. 이번 아베 전 총리의 총격사건 역시 사건발생 직후 한국인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잘못된 소문이 일본에서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데 큰 거부감이 없었던 것도 일본 내 혐한 수위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
한·일관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외교·안보·경제·문화 등 일본과 관계되지 않은 분야를 찾기 어렵다. 하지만 ‘역사적’ 특수성 때문에 개선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양국의 국민적 감정은 두 나라 관계 설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만큼 민감하며,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위험한 지경까지 온 상황이다. 혐오의 감정은 넘쳐나고, 이를 막거나 중재하려는 시도보다는 오히려 부추기고 이용하려는 세력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혐오가 사회 전반에 고착화된다면 한·일관계 개선에 큰 걸림돌이 될 뿐만 아니라 양국 간의 국민 감정은 더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혐한은 한·일관계 악화에 언제든지 불쏘시개가 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경색된 한·일관계를 개선하고자 한다.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인 만큼 건물 짓듯이 기초부터 하나씩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런 기초공사를 방해하는 혐한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정부의 노력만으론 부족하다. 그 시작의 일환으로 혐한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대책을 세워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정치권도 유명무실해진 한·일의원연맹을 통해 양국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헤이트 스피치를 자제하고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마중물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민간차원에서도 문화교류로 서로를 이해하고 반성하는 모습이 양국의 언론을 통해 소개될 수 있어야 한다.
한·일관계의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경색된 한·일관계 시절에도 광복절에 나오는 정치권의 메시지에 양국의 언론과 국민은 주목했다. 이번 광복절 대통령의 메시지에 한·일관계 개선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기를 기원한다.
노윤선 고려대 글로벌일본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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