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직필] '한산'에서 보는 동아시아 세계체제

이일영 한신대 교수 2022. 8. 1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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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이 화제를 낳고 있다. 전투장면 묘사가 압도적이고, 이순신 장군의 지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여기에 내외적으로 어려운 최근 현실과 겹쳐지는 장면들이 많아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이일영 한신대 교수

첫째, 한산대첩은 동아시아 해양사의 중대한 고비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영화에서는 일본 측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주요 인물로 떠올렸다. 허구이겠지만, 와키자카는 황해를 거쳐 톈진으로 가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이렇게 영화는 이순신과 와키자카의 대결을 통해 임진전쟁의 세계전쟁으로서의 성격을 부각한다.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한산대첩의 한 번 싸움으로 나라가 보존되고 요동과 천진에 왜군의 발자국이 미치지 못했다”고 기술한 대목을 떠올리게 된다.

와키자카의 실제 위상은 영화에서만큼 높지는 않았다. 와키자카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선봉군 휘하에 있었고, 일본 내 영지 규모도 고니시나 가토 기요마사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가 동아시아 해상네트워크에 연결된 인물이었다는 점은 관심을 둘 만하다. 와키자카는 전국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에 참여한 바 있다. 규슈지역은 임진전쟁으로 강력해진 군사력을 토대로 류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동아시아 관점에서 본다면, 영토국가가 경계를 넘는 해상세력의 혁신능력을 배척할 때 쇠퇴의 길을 가는 것 같다. 당나라 시대에도 동아시아 차원의 해상네트워크가 작동했다. 신라는 장보고 집단을 제거했고, 고려는 해상집단과 연결하여 혁신요소를 품어 안았다. 명나라 시대의 해상세력은 중국과 일본을 넘나들었다. 가정제 시기의 왕직 집단은 절강 연해와 일본 규슈 연해를 연결하는 세력이었는데, 명나라 조정은 이들을 배척했다.

둘째, 한산대첩 이면에서 벌어지는 기술혁신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최근 연구들은 기술혁신의 연속성과 집합적 상호작용에 주목한다. 산업혁명에서 중요했던 증기기관도 제임스 와트가 어느 날 개인적으로 발명해낸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거북선이 활약하게 되는 연속적 과정을 보여준다. 사천해전에서 처음 출전한 거북선의 용머리가 기동력을 저해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조선군은 이를 개선하려 노력했다. 거북선의 설계도가 탈취 당하자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심한다.

영화에서는 나대용의 면모가 새롭게 그려진다. 그는 밤낮없이 거북선 연구와 제작에 매달리는 엔지니어이면서, 또 한편에서는 작전을 구상하는 이순신과 긴밀하게 소통하고 실전에 참여한다. 나대용의 실제 경력을 보면, 이순신처럼 문장에 뛰어난 문인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병선을 연구했고 거북선을 제작했다. 그는 조선기술은 물론 전투기술에도 뛰어났다. 옥포·사천·당포·당항포·한산도·명량·노량에 출전하여 전투를 지휘하고 군공을 세웠다.

거북선의 ‘출현’은 연속적인 과정이었다. 거북선은 전문기술자들만으로 돌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나대용은 조선기술 인력으로 양성되지 않았다. 거북선은 조선 초기부터 제작을 시도했던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다. 여기에 혁신인력을 키우고 활용하는 이순신의 리더십이 작용했다. 이순신은 전쟁 전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면서부터 새로운 조선기술 수요를 인식하고 나대용의 전문성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최근 상황을 비추어보면, 산업인력 양성도 성급히 접근할 문제는 아니다. 특정 인력의 양적 공급에 치중하는 것보다는 수요 측면, 숙련 제고 등에 주의해야 하겠다.

한편 영화에서는 임진전쟁을 ‘의와 불의의 싸움’으로 규정했다. 투항 왜인의 동기가 이순신이 의인이라는 것, 조선 측이 의로운 세력이라는 것인데, 이 부분은 설득력이 충분치 않다. 민족 구성원 대다수가 행동적 차원에서 참여·저항하는 동력으로서의 ‘의’라는 개념에 대한 서사가 좀 더 필요할 것 같다(오드 아르네 베스타 교수). 작금의 상황에서라면, 신중한 이순신은 동아시아 세계체제를 깊이 시름할 것이다. 남해안 민심을 결집한 이순신, 규슈의 해상세력을 흡수한 와키자카, 광동에서 활약했던 진린이 명량 바다에서 결전해야 했던 상황에 애가 끊어질 것 같겠다.

대결은 혁신 네트워크를 무너뜨린다. 전쟁이 벌어지면 당사국은 존망의 백척간두에 서고, 민생은 도탄에 빠진다. 칩4 회의가 임박했다고 한다. 칩4 회의는 반도체 분야의 ‘협력’ 네트워크의 회의가 되게 하고, 한·미 ‘동맹’과는 구별해야 한다. 외교부는 칩4를 배타적 성격을 지닌 ‘동맹’이 아니라 ‘공급망 협력 대화’로 가져가려 한다고 한다. 이런 입장을 신중하고 꾸준하게 관철해나가길 기대한다.

이일영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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