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83] 어떤 광복절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2022. 8. 1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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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한일 관계를 생각하는 시간이다. 한쪽에선 영화 ‘한산’을 보면서 과거를 상기하고, 다른 한쪽에선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가 미래 지향적이기를 기대한다.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에게 고통과 분노의 시간이었다. 친일파 후손들도 그때의 기억이 편치는 않다. 생물학자 우장춘이 그랬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범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1950년 귀국할 때 주변에서 그의 안녕을 염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라며 고집스럽게 배를 탔다. 그리고 아버지의 업보를 씻는 마음으로 부산에서 여생을 보냈다.

1953년 일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우장춘의 변심을 의심하며 출국을 금지했다. 6·25 전쟁 중 현역 해군 소령으로 근무할 정도로 애국심이 컸던 우장춘은 그 의심까지 감내하며 아홉 번의 광복절을 정직하고 담담하게 맞았다. 출생 자체가 한일 근대사의 비극이었던 우장춘의 충정은 과학으로 빛난다. 씨 없는 수박 말고도 제주도의 감귤과 유채꽃, 병충해에 강한 강원도 감자는 그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죄하는 마음으로 만든 것들이다.

친일파 후손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우범선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구연수의 장남 구용서(일본명 구하라 이치로)가 그렇다. 구연수가 조선총독부 고위경찰인 덕에 그 아들 구용서는 도쿄상대에서 유학을 마친 뒤 조선은행에 단독으로 채용되었다. 그리고 조선인인데도 도쿄에서 근무하는 전무후무한 특혜를 누렸다. 거기서 친일파 송병준의 손녀(노다 미에코, 한국명 송지혜)와 결혼했다. 광복 직후 귀국해서는 그런 과거를 꽁꽁 감추고 있다가 한국은행 초대 총재가 되었다.

1959년 오늘 우장춘이 61세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이종사촌이었던 구용서는 그때 상공부장관이었다. 우장춘과 달리 자신의 모든 것을 감추고 속였던 구용서는 해마다 광복절이 괴로웠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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