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라는 사막서 만난 '검은 해골'.. 그가 나를 살렸네
바다에서 죽어버려야지, 하고 K는 바다로 왔다. 하지만 예상 못 했던 게 있었다. 겨울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살하기에 여름 바다에는 인간이 너무 많았다. 그런 빤한 사실을 계산하지 못할 만큼 K는 무너져 있었다. 부서져 가루가 돼 있었다.
애나 어른이나 방금 지옥에서 사면이라도 된 것처럼 신이 난 해변을 보자마자 K는 두통이 일었다. 역겨운 세상에 끝까지 조롱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K는 서울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자살을 고민하던 중에 봐둔 빌딩 옥상이 있었다. 그래, 겨울 바다는 추워서 뛰어들기 힘들었을 거야. 수면제 왕창 삼켜봤자 숙면 끝에 깨어날 수도 있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제일 쉽고 확실하지. 그런 생각을 하며 기차역 부근 식당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던 K는 막걸리 통을 물끄러미 보다 문득, 작년 이맘때 오후를 연상하게 되었다. 그날 그 지역에 간 것은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었다. 술집 앞에 나와 담배에 라이터 불을 붙이던 K는 비명도 호소도 아닌 기이한 “막걸리ㅡ” 소리에 고개들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그’였다. 그는 이십 년 전 그대로였다. 빙하 속에 보관되다가 시간의 장막을 뚫고 불쑥 현실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아무리 적게 추측해줘도 족히 육십 대 후반일 텐데, 변한 건 K와 세상뿐이었다. 중키에 단단히 마른 체구, 거지 옷차림에 피골이 상접해 햇볕에 재가 된 얼굴로 리어카 가득 수제 막걸리를 실은 채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듯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순례하는 자.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싶게 항상 피에로 웃음을 짓고 있는 자. 어쩌면 그는 불경(佛經)을 얻으려 실크로드를 횡단하는 승려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막의 과거는 ‘바다’다. 낙타와 고래는 같은 포유류라서, 어떤 고래들은 오래전에 헤어진 낙타가 보고 싶어 해안에 올라가 죽어간다는 어느 소설의 한 대목을 읽은 적이 K는 있었다. 그가 K를 알 리 만무했고, K가 먼발치에서 혼자 속으로 그를 ‘검은 해골’이라 이름 붙였던 게 K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가 많이 아팠다. 종합병원 옆에 숙소를 마련해두고 병실을 오가며 간호했다. 그러며 이 길 저 길에서 가끔 검은 해골을 보았다. 저 많은 막걸리가 팔리기는 하는 걸까?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런 독보적 이미지로 고행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일까? K는 그런 의문을 품었더랬다. 어머니가 병실에서 숨을 거둔 뒤 K는 그 종합병원이 있는 지역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간혹 어쩔 수 없이 스쳐 지날 적에는 가슴이 아팠다. 이후 K에게 누군가가 곁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는 일마다 실패한 그에게는 결국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성경과 성경 구절을 적어둔 노트를 유품으로 남겼다. 무신론자인 K는 어머니의 옷가지와 함께 싹 다 불태워버리고 싶었지만, 웬걸, 외로울 적마다 그 성경과 노트를 들춰보곤 했다. 어머니는 하나님의 축복 밖에서 아파 죽어가면서도 왜 이런 이상한 글귀들을 좋아했던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한여름 땡볕 아래서 검은 해골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K는 달려가서 그를 붙잡고 도대체 왜 그러고 사냐고, 삶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고 싶었다. 지난날들의 고통을 다 털어놓고만 싶었다. 인간에게 어려운 것은 제 인생에 잡아먹히지 않는 것이다. 천년을 더 버틴들 뭐가 달라질 게 있겠나 싶은 절망감이었다. 병실 침상에서 어머니는 바다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이틀 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암이 재발하기 전, 어머니는 운전면허와 심리 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써먹지도 못할 그런 짓은 왜 했나 싶었다. K는 죽으러 바다로 내려오면서, 한 사내가 아내와 딸을 태운 차를 몰아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기차 안에서 술이 깬 K는 서울역에 도착했다. 새벽 3시였다. 택시를 탄 K는 투신자살을 위해 봐두었던 그 빌딩으로 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건널목 앞에서 택시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뒷좌석에서 졸고 있던 K는 괴성에 눈을 떴다.
“……세상에…….”
검은 해골이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 사막을 가는 낙타처럼 자신의 무거운 짐을 끌고 그 새벽 세상을 지나고 있었다. 택시 기사가 말했다.
“이야. 희한한 사람이네. 뭐라고 그러며 가는 거죠? 하핫.”
……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으며, 매를 맞았으나 죽지 아니하였고, 슬퍼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며,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들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거 같으나 모든 것을 가졌느니라.
K는 어머니가 그리울 적마다 하도 읽어서 외워버린 그 노트에 적힌 한 부분이 어머니의 목소리로 떠올랐다. K는 점점 멀어지는 낙타를 바라보았다. 그 뒷모습에 여름 바다 파도 소리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K는 삶이 다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의 죽음이 머물던 종합병원 영안실의 불빛이 왼편 차창 밖으로 보였다. K는 어머니가 아들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K는 택시에서 내려, 남루한 잠자리가 있는 집까지 오래 걸어가고 있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사막을 건너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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