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인호 칼럼] 부랴부랴 출범한 尹정부의 결정적 순간
한 사내가 걷고 있다. 비가 내렸던 듯 도시의 거리에는 물웅덩이가 곳곳에 생겨 있다. 그 사내는 구두가 물에 젖지 않게 위해서인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물웅덩이 위를 폴짝 뛰어넘는다. 그 순간을 한 사진작가가 포착한다.
사진을 기록에서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는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대표작 '생 라자르 역 뒤에서(1932년)'에 담겨있는 모습이다. "사진보다 인간의 삶에 더 관심이 많다"던 작가는 최대한 인위적인 연출을 배제했다고 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을 재빨리 파악하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 시간을 사각의 틀 안에 응고시킨 그의 작품 속에는 현대사의 결정적인 순간 못지 않게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순간들이 현재화돼 있다.
그래서 인생의 찰나가 오롯이 담겨있는 '생 라자르 역 뒤에서'를 지그시 바라보면, 물웅덩이를 뛰어넘는 '저 사내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뭘 하는 사내일까'라며 그의 사연이, 그의 인생 항로가 떠올려진다. 이것이 바로 사진 역사에서 가장 많은 페이지가 할애된 '결정적 순간'-1952년에 발간된 브레송의 사진집 영문판 제목(The Decisive Moment)이기도 하다-의 탄생이다.
국정운영에 인위적인 연출을 최대한 배제하고 있다는 윤석열 정부도 '결정적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취임 100일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지지율은 퇴임 시점에도 기록하기 힘든 20%대를 기록하고 있다. '공정과 자유'의 총아가 되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불공정을 일소하고 억압받고 있던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든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 명 중 예닐곱 이상이 고개를 가로 젓고 있다.
억울하다는 감정도 들 수 있겠다. 3개월간 한 것이라곤 전 정권이 삐뚜름하게 박아놓은 외교며 경제원칙을 바로 잡기 위해 일 한 것뿐인데 말이다. 거대 야당의 발목, 기울어진 언론 환경, 여론 조작, 내부 총질 등을 탓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남 탓은 권력을 잡은 이상 부질 없는 짓이다. '검찰 공화국' 때문인지, '김건희 여사 비선 의혹과 논문 표절' 때문인지, '인사 난맥상' 때문인지, '내부총질하는 당대표' 때문인지, '경찰국 신설' 때문인지, '만 5세 취학 논란' 때문인지 등 지지율 하락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분석해봐야 도움도 안 될 터이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윤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에서 '매우 잘 못함'이 62.6%(TBS-KSOI, 8.5~8.6 조사), 60.5%(리얼미터 주간집계, 8.1~8.5)로 극명하게 높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 올라온 역대 대통령들의 여론조사 결과와는 사뭇 다르다. 예전엔 아무리 잘 못해도 '대체로 못하고 있다'거나 '못하는 편이다'라고 답하는 경향이 훨씬 강했다.
지금의 국정 지지율은 '그냥 싫다'라는 의미와 비슷하기 때문에 하락 원인 분석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다.
다만, 현 시국과 정국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인식 변화라는 결정적 순간이 필요한 것만은 맞다. 정치 참여 선언 채 1년도 안 된 시점에 대통령이 되어 부랴부랴 출범한 정권이기에 안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밖이 아니라 안부터, 남이 아니라 나부터 돌아보는 전환이 필요한 결정적 순간이다. 다른 건 몰라도 '불법 파업' 앞에서 고개 숙이고 '코인 투자' 손실을 사회적 비용으로 보전해주려는 모습을 보며 자유주의자들의 실망감이 이만저만 커진 게 아니다. 윤 대통령에게서 '공정'과 '자유'의 이미지가 달아나고 있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관찰되었던 것이다.
"초심 지키며 국민 뜻 잘 받들겠다"는 휴가 복귀 후 윤 대통령의 첫 일성은 관념적이지만 인식의 전환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 초심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손수 고치고 또 고치며 작성했다는 취임사가 초심이기를 바란다. 그는 취임사에서 자유를 35번이나 외쳤다.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에서 이처럼 '자유'가 소중한 가치로 대접받은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자유주의'라는 초심이 지켜지길 기대한다.
발매 70주년을 맞은 브레송의 사진집의 원 제목은 '부랴부랴 찍은 이미지(Images a la sauvette)'이다. 영문판 출간 당시 편집자가 프랑스판 서문에 적힌 인용구 "이 세상에 결정적이지 않은 순간은 없다"라는 문구에서 발췌한 '결정적 순간'을 제목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우인호 전략기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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