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그대가 그대의 재앙이지요"

최재봉 2022. 8. 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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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봉의 탐문][최재봉의 탐문] _19 팬데믹

“전염병이 주로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염병 앞에서 겁 없이 무모하게 움직이며 맡은 일을 일종의 야만적인 용기로 해낸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병든 사람을 돌보거나, 봉쇄된 집을 감시하거나, 병에 걸린 사람들을 격리 병원으로 이송하는 일이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한 일이었으며, 이보다 더 위험한 일로는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는 작업이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죽음으로/ 도시는 죽어가고,/ 이 도시의 자식들은 동정도 문상도 받지 못한 채/ 땅바닥에 누워 죽음을 퍼뜨리고 있구나./ 거기에 맞춰 아내들과 백발의 노모들은/ 여기저기서 제단으로 몰려가 통곡하며/ 쓰라린 고통에서 구해주기를 애원하고 있구나.”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왕>에서 역병이 번진 도시국가 테베의 참상을 노래하는 코러스의 한 대목이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베의 왕좌에 오른 오이디푸스는 역병의 원인과 해법을 찾고자 신탁을 청해 들은바, 선왕 라이오스의 살해범을 벌하지 않는 한 역병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신탁을 좇은 결과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선왕이자 친부의 살해범임을 알고 제 두 눈을 찌른 뒤 테베 바깥으로 스스로 추방당하는 결말은 비극이라는 문학 장르의 원형을 이루었다.

그리스 비극의 가장 유력한 적자(嫡子)라 할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의 가짜 죽음을 로미오에게 알리고자 파견됐던 존 신부는 흑사병에 걸린 이들의 집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방역당국에 의해 감금되는 바람에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이 일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진짜 죽음으로 귀결된다. 1603년에서 1613년까지 런던을 휩쓴 흑사병 유행 때 셰익스피어가 소속된 글로브 극장은 무려 78개월 동안이나 휴관해야 했고, 그런 휴지기에 그는 <리어왕> <맥베스> <오셀로> 같은 걸작들을 집필했다. 그러니까 흑사병은 배우이자 극장 경영자 셰익스피어에게는 치명적이었지만 극작가 셰익스피어에게는 하늘이 내린 기회이기도 했던 셈이다.

<오이디푸스왕>에서 보듯, 역병에 관한 과학적 이해가 부족했던 고대인들에게 가장 손쉽고 개연성 있는 서사는 그것을 신이 내린 벌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런 태도는 이성과 과학의 시대라 할 현대에도 면면히 이어진다.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슬픔과 불안에 쫓겨 성당을 찾은 시민들에게 파늘루 신부는 “여러분은 불행을 겪어 마땅하다”고 매몰차게 선언한다. “반성할 때가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파늘루 신부의 이런 생각은 오르한 파무크의 소설 <페스트의 밤>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는 이슬람 성직자 셰이크 함둘라흐가 신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신에게 의지하는 것밖에 다른 위안이 없습니다.”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대니얼 디포는 <페스트, 1665년 런던을 휩쓸다>라는 책에서 매우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필치로 흑사병의 파괴력과 그에 대한 대응을 그렸는데, 특히 대규모 전염병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협하는 사회구조를 날카롭게 관찰한 사실이 놀랍다.

“전염병이 주로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염병 앞에서 겁 없이 무모하게 움직이며 맡은 일을 일종의 야만적인 용기로 해낸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 병든 사람을 돌보거나, 봉쇄된 집을 감시하거나, 병에 걸린 사람들을 격리 병원으로 이송하는 일이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한 일이었으며, 이보다 더 위험한 일로는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는 작업이 있었다.”

이 책은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냉철하고 합리적이며 동시에 넘치는 휴머니즘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디포 역시 시대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이런 대목에서 알게 된다.

“그것(=흑사병의 종식)은 틀림없이 처음에 우리에게 일종의 심판으로 질병을 보냈던 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은밀한 손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듯 역병을 신의 심판으로 파악하는 유구한 전통에 비춰 보면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오히려 이례적으로 다가온다. 흑사병을 그린 가장 초기 문학작품이라 할 이 소설집에서 신에 대한 두려움 대신 인간의 육체적 쾌락에 대한 예찬을 만나는 것은 놀랍기 그지없다. 중세의 한복판인 1353년에 탈고한 이 작품은 단테(1265~1321)의 <신곡>에 견주어 ‘인곡’(人曲)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단테의 작품이 신의 섭리와 종교적 구원을 다루는 반면 <데카메론>은 인간들의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담은 데에서 그런 별칭이 비롯되었다. 문제는 보카치오가 생각한 인간적 면모의 핵심이 성욕의 자유분방한 추구와 충족에 있다는 사실이다. <데카메론>은 한마디로 음담패설이라 할 정도로 분방하고 음탕한 성애의 묘사로 질펀하다.

그런데 하필 흑사병의 습격으로 죽음이 만연한 때에 성욕의 과감한 분출을 예찬한 소설이 쓰이고 읽힌 까닭은 무엇일까. 프로이트가 말하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관계에서 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쾌락 충동과 죽음 충동이 통한다는 그의 통찰은 <데카메론>의 배경과 작품 주제의 관계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눈앞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가 억눌려왔던 쾌락 충동을 자극했다는 해석이 가능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라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데카메론>의 후예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작품은 사실 제목과는 달리 콜레라가 만연한 무렵이 아니라 ‘콜레라 이후’의 시기를 무대로 삼는데, 그럼에도 콜레라는 여전히 흔적과 그림자로 남아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설 속 주요 인물인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가 여주인공 페르미나 다사를 처음 만나고 결국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된 계기가 “콜레라의 예비 증상”을 보이는 환자를 진료해 달라는 동료 의사의 부탁이었다. 페르미나의 첫사랑이었던 남주인공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실연의 상처를 안고 무려 반세기 남짓을 기다린 끝에, 우르비노 박사가 사고로 숨진 뒤에야 페르미나와 재결합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도 콜레라는 사랑의 중개자 역할을 톡톡히 한다. 소설 말미에서 두 사람은 콜레라 환자 발생을 알리는 노란 깃발을 (가짜로!) 단 배에 단둘이 탄 채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랑의 항해를 계속한다.

“두 사람은 경험 많은 노인들답게 조용하고 건전한 사랑을 나누었다. (…) 사랑은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사랑이지만, 죽음이 가까워올수록 그 사랑의 농도는 진해진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함께 충분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김탁환의 소설 <살아야겠다>는 2015년 한국에서 번진 변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 메르스 사태를 비판적으로 되짚어본 작품이다. 작가는 특히 환자의 생명보다는 정권의 안위와 병원의 수익을 앞세우는 본말전도식 사고에 날을 세운다. 메르스는 세월호 참사 1년여 뒤에 한국 사회를 덮쳤고, 정권의 무능과 무책임은 세월호 때나 메르스 때나 다르지 않았다. 메르스에 걸렸다가 회복된 방송기자 이첫꽃송이에게 선배 기자 선우병호는 이렇게 말한다. “세월호란 배에 타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안일하고 허약한 자기합리화가 그를 죽음으로 내모는 중이지. 그렇게 비겁한 다행에 안주하면 결국 언젠가 우리도 외롭게 불행을 만나게 돼.” 여기서 병호가 말하는 ‘그’란 ‘마지막 메르스 환자’로 찍힌 뒤 병원 격리실에 갇힌 채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고 결국 숨지고 만 김석주를 가리킨다.

병호는 첫꽃송이에게 디포의 책 <페스트, 1665년 런던을 휩쓸다>를 권하며 그 책처럼 2015년 한국 사회의 메르스 사태를 기록으로 남기자고 제안한다. 추상적인 숫자나 통계가 아니라 피해자들의 생생한 경험과 느낌을 담은 “피해자들의 서사”를 남겨야 가까운 미래에 되풀이될 수도 있을 잘못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의 의미가 거기에 있겠거니와, 소설 <살아야겠다>가 바로 그런 피해자들의 서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재앙이지요.”

<오이디푸스왕>에서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라이오스의 살해범을 추궁하는 오이디푸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이디푸스는 이런 테이레시아스의 말을 무시한 결과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불이익과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오이디푸스의 용기는 가상하다 하겠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따로 있다. 코로나19 사태의 원인이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교훈 말이다. 지구를 착취하고 생태계를 파괴한 결과 인간이 인간 자신의 재앙이 된 현실을 코로나19 팬데믹은 준엄하게 경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최재봉 | 책지성팀 선임기자
1988년에 한겨레에 들어와 1992년부터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하며, 문학의 본질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 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지구를 위한 비가> 등이 있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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