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티탄이 든 팻말 '승소'

한겨레 2022. 8. 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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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9일 국가배상소송에서 진술하기 위해 방한한 응우옌티탄(왼쪽), 응우옌득쩌이(오른쪽)가 변론 전 “승소”란 푯말을 들고 웃고 있다. 한베평화재단 제공

[세상읽기] 임재성 |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

‘너무 오래된 일이잖아요. 지금 한국과 베트남 정부 사이 관계도 좋고, 교류도 많고요. 그냥 잊고 사셔도 되지 않냐고, 굳이 오래된 일을 왜 끄집어내시냐,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요?’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이자 생존자 응우옌티탄(62)은 지난주 금요일 한국에 입국했다. 2015년부터 이어진 네번째 방문이다. 서울중앙지법에서 진행되고 있는 국가배상소송에서 원고로서 진술하기 위해서다. 그는 2년 전, 대한민국을 상대로 학살의 진실과 책임을 인정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1975년 종전 이후 40년 넘게 침묵하다 2년째 피고석에 앉아 있는 한국 정부는 일관됐다. 인정할 수 없다. 증거가 없다. 정부 기록은 보여줄 수 없다.

소송 막바지 법정에서 진술하기 위해 한국에 온 응우옌티탄. 필자는 응우옌티탄의 네번의 한국 방문 중 세번을 함께했고, 이 소송대리인이기도 하다. 이번 진술을 위한 준비를 하던 중, 사람들이 묻고 그녀가 답해오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1968년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아닌, 2022년 현재의 감정과 생각을 물어봤다.

‘괘씸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냥 잊고 사면 안 되냐, 누가 묻는다면요?’ 그녀는 담담했다. “있었던 사실에 대한 것이잖아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시간을 쪼개가며 국회며 청와대, 언론사를 찾아가 호소하고 화도 내며 요구한다. 하지만 매번 미끄러진다. ‘그냥 잊고 살면 안 될까’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을까? “있었던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양쪽 나라에 나쁜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예요.”

지치지는 않을까. “솔직히 실망스럽죠. 이전 세번째 방문에도 생각처럼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2015년 첫 방문 때만 해도, 내가 살아 있는 증인이니까, 온 힘을 다해 이야기하면 한국 정부와 참전군인들, 시민들이 공감하고 인정할 줄 알았어요. 사과할 줄 알았지만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그녀는 이번 방문이 가장 기운이 난다고 했다. “이번에 진짜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하는 법정에 서게 되니까 안심이 돼요.” 안심이라는 단어가 낯설어 다시 물었다. “그냥 감각적으로, 이제는 좀 끝까지 온 거 아닌가, 이 소송을 통해 이제는 한국 정부가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 지치면서도 안심이 돼요.” 그녀도 알고 있다. 승소할 수도, 패소할 수도 있다는 것을. 또 1심에서 승소한다 해도, 대한민국은 이 소송을 대법원까지 끌고 갈 것이다. 5년 정도 걸릴 수 있다고 했지만, 그녀는 낙관적이었다.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피해자에게 ‘가능성’을 물어봤다. 한국 정부가 사실을 인정하고, 당신에게 사과할 가능성을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나. “희망사항으로는 90%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변호사님들이나 여러 시민이 함께 아파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거 보면서 말이죠.” 그녀가 낙관하는 이유는 그녀와 연대하는 이들 때문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그녀가 처음 방문한 이후 7년 동안 그녀를 지원하는 운동이 커지거나, 여론이 달라지진 않았다. 문재인 정부든 윤석열 정부든 이 문제를 부담스러워하고 외면한다. 총체적 무관심 속에서 소수 활동가와 시민사회가 지속적인 연대를 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한국 정부가 자신의 주장을 정 못 믿겠다면, 인정할 증거를 못 찾겠다면, 한번이라도 학살이 벌어졌던 퐁니 마을에 와서 조사해보라고 말한다.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살아 있는데, 이 사람들 이야기 한번 안 들어보고 학살이 없었다 말하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거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어떨까요?’ “너무 기쁠 것 같아요. 저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74명이 다른 세상에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으실 것 같아요.”

이 칼럼을 송고하고, 이제 그녀와 법정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녀가 식사를 마치고 촬영한 사진이 준비팀 대화창에 올라왔다. “승소 thắng kiện(탕끼엔)”이라는 피켓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안심됐다. 90%의 가능성을 믿는 피해자가 한국 법정에서 멋지게 진술하길 바란다. 당신이 당한 고통을 그대로, 요구하는 내용을 솔직히 말하길 바란다. 당신이 낙관하는 만큼 우리가 변할 수 있기 위해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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