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게 살아온 70여년' 제주4·3 희생자 30명 무죄

오영재 2022. 8. 9.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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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내용 요약
유족 "친가·외가 모두 희생…명예 회복에 감사"
"삼촌과 5촌 거리서 불시 검문에 의해 잡혀가"
"16살 때 사실상 고아…'폭도의 자식'으로 불려"
전문가 "끝끝내 살아남아 공동체 일궈내…기적"

[제주=뉴시스] 백동현 기자 = 지난 29일 오후 제주시 4.3 평화공원에 행방불명인 표지석 앞에 국화꽃이 놓여 있다. 2022.04.01. livertrent@newsis.com

[제주=뉴시스] 오영재 기자 = 불법 군사재판으로 억울하게 수형된 제주4·3 희생자 30명의 명예가 회복됐다.

제주지방법원 제4-2형사부(부장판사 장찬수)는 9일 오전 제주4·3 제10차 직권재심을 열고 희생자 30명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번 재심 대상자들은 1948년부터 1949년까지 내란죄 등으로 불법 군사재판에 회부돼 유죄 판결을 받고 형무소 등에서 수형인 생활을 하다 숨지거나 행방불명된 희생자들이다.

검찰의 제주4·3사건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은 이날 "피고인들은 공소사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고, 체포 과정에서도 적법절차가 준수되지 않았다"며 "제출할 증거가 없다"고 무죄를 구형했다.

희생자 측 변호인은 "재심 대상자들은 당시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중산간 마을에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수형인 생활을 하다 행방불명됐다"며 "오랜 시간이 지나고 현재와 같이 직권재심이라는 절차가 생겨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재판받을 기회가 주어졌다"며 무죄 선고를 요청했다.

이후 재판부는 "범죄의 증명이 없는 때에 속하므로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시했다.

이날 법정에서는 희생자 유족들이 오랜 세월 겪었던 아픈 사연들을 전하기도 했다.

희생자 고(故) 박명환씨의 조카 박영철씨는 "큰할머니로부터 얘기를 들었다. 관덕정 마당에서 4·3 집회가 있었는데, 당시 큰할아버지가 순경한테 잡혀 제주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 목포형무소로 이감된 이후 소식이 끊겼다고 했다"며 "친할아버지도 4·3 당시 폭도로 몰려 죽창에 찔려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이어 "이 모든 어려움이 제주도민들의 아픈 가슴 속에 있어 왔다. 지금이나마 이렇게 명예 회복을 위해서 힘써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삼촌과 오촌이 현재까지 행방불명된 상태로 남아있다는 고(故) 하영선씨의 조카 하민식씨는 "삼촌이 부산 대학에 다녔는데, 고향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오촌이 삼촌 집에 찾아왔다. 기쁜 마음에 두 분이 외출에 나섰다"며 "두 분은 그날 거리에서 불심검문에 의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끌려갔다. 이게 두 분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전했다.

[제주=뉴시스] 우장호 기자 = 제74주년 4·3희생자 추념식 날인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 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지석에 유족들이 찾아와 참배하고 있다. 2022.04.03. woo1223@newsis.com

하씨는 "7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오늘 이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내려 주어 돌아가신 희생자를 비롯해 살아있는 분들도 명예 회복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며 "4·3사건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 언론사, 4·3단체 임직원, 제주지역 일간지 재직 시 4·3과 관련된 책을 집필한 양조훈씨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했다.

고(故) 이동찬씨의 아들 이효호(81)씨는 "4·3 당시 피신을 가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던 아버지가 행방불명됐고, 조부모와 동생이 세상을 떠난 이후 어머니마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16살 때부터 고아나 다름없이 지냈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렇게 자라면서 가장 슬펐던 것은 폭도의 자식이라고 들은 것이다. 그때는 나이가 어려 4·3이 뭔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씨는 "세월이 흘러 이 자리에 서게 됐다. 수십 년간 4·3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해준 모든 분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말을 전한다"고 했다.

이날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보던 김종민 제주4·3중앙위원회 위원도 소감을 밝혔다. 김 위원은 과거 제주지역 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7000명이 넘는 제주4·3 희생자와 유족의 진술을 채록했고, 희생자 조사에도 가장 오랜 기간 참여한 제주4·3 전문가다.

그는 "20여년 전 취재를 하러 갔을 때 만났던 분들을 최근에 다시 만나고 있다. 제일 기쁘게 하는 것은 거실에 걸려있는 희생자 유족들의 사진"이라며 "팔순 잔치를 보면 아들과 손주들 다 모아 놓고 사진을 찍곤 하는데, 30명가량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근데 그분은 고아였다. 4·3 당시 아버지와 형 등 가족을 다 잃었다"며 "10세 미만의 소년들이 어떻게 그 세월을 견뎌왔는지, 끝끝내 살아남아서 제주 공동체를 복원해냈다"고 평가했다.

김 위원은 "굉장히 기적적인 일이다. 당시 6살이면 지금 80살 정도 됐을 텐데, 좌절하지 않고 그 어린 나이에 여린 손으로 어떻게 마을을 일으켜 세웠는지, 아름다운 제주 공동체를 만들어냈는지 등을 생각하면 경이롭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oyj4343@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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