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람 중사 父, 빈소서 445일..그를 분노케한 '또다른 메모'

김남영 2022. 8. 9.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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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일. 고(故) 이예람 중사의 아버지 이주완(59)씨가 8일까지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국군수도병원의 장례식장 101호를 지킨 기간이다. 20전투비행단 근무 중 상관에게 성추행을 당한 이 중사는 피해사실을 바로 군에 알렸다가 사건 은폐‧회유‧협박 등 2차 가해에 시달린 끝에 지난해 5월 21일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이 씨는 이후 하루도 빈소를 비우지 않았다. 지난 7일 찾은 빈소는 고등학교 때부터 공군 20전투비행단(20비행단)에 있을 때 까지 찍은 이 중사의 사진들로 가득차 있었다. 사건의 진상이 다 드러날 때까지 자르지 않겠다고 약속한 이씨의 수염은 이미 덥수룩했다.

빈소에서 만난 이씨는 최근 공군에서 이어진 사건들에 대한 분노부터 드러냈다. 이씨는 “15비행단(공군 제15특수임무비행단)피해자도 ‘군이 내게 죽으라 등 떠민다’고 메모를 남겼는데, 그게 우리 예람이가 한 메모랑 똑같다”고 말했다. 영정 속의 이 중사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는 이씨는 “어느날 예람이랑 대화하던 중에 왠지 불안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며 “지난달 초엔가 국방부 관계자 5명이 찾아 왔을 때 ‘예람이가 있던 20비행단과 15비행단에 대해 특별히 좀 점검을 해달라’고 부탁했었다”고 말했다.

국방부 관계자들이 이씨에게 다녀간 지 열흘 남짓 지난 지난달 19일 이 중사와 같은 부대 같은 호실을 숙소로 사용했던 A하사가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벌어졌다. 군인권센터에 따르면 A하사는 부대 내 괴롭힘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겼고, 이 센터는 지난 2일 15비행단 소속 B하사가 지난 1월~4월 성폭력을 당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씨는 B하사의 메모를 보고 이 중사가 세상을 등지기 전 남긴 “내가 여군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뼛속부터 분노가 치민다”는 등의 말들을 떠올렸다. 이씨는 반문했다. “군이 그때라도 자살예방 프로그램을 실행하거나 무기명으로 ‘마음의 소리’라도 써내게 했다면 A하사는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요.”

고(故) 이예람 중사의 아버지 이주완(59)씨가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국군수도병원의 장례식장 101호에서 딸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김남영 기자


“피해자 생각 못 하는 軍...여전히 사건 무마 급급”

군이 피해자 중심의 사고로 전환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씨는 “보신주의에 젖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A하사 유가족들이 병원으로 시신을 올기려 하자 군에서 ‘타살혐의점이 없으므로 부검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서류에 서명하지 않으면 이동할 수 없다’한 것도 진상규명이나 피해 회복보다는 사건 파장 무마에 급급한 군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B하사 사건에서도 피해자인 하사들끼리 갈라치기 하려고 하고,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려고 했다”며 “결국 피해자를 겁먹게 해 없던 일로 만들려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는 인사 평정권을 가진 간부들이 주로 가해자가 된다는 현실도 상기했다. 장기복무나 진급에 영향을 주는 간부가 가해자인 경우가 많아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일 제대로 밝히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씨는 “평정권을 쥐고 있는 이들은 한 부대에서 10년 이상 근무하는 경우가 많다”며 “오래 있으면 물이 썩는다. 피해사실이 신고되면 가해자를 곧바로 직무에서 배제하고 순환배치를 활성화해야 사건 발생을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주완씨는 고(故) 이예람 중사에 대해 “딸은 활달하고 리더십도 있어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도 했다”고 말했다.

“특검, 아직 시간 남아…실망하긴 이르다”


이 중사에 대한 2차 가해 및 군의 사건 은폐 의혹을 밝히기 위해 지난 6월5일 출범한 ‘이예람 중사 특검’(특별검사 안미영)의 1차 법정 수사 기한(8월13일)이 다가오고 있다. 지난 3일 활동기간 연장을 신청했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승인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특검팀은 군 자체 수사과정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은 군사경찰과 군검찰, 공군본부 법무실 관계자들의 고의 은폐 및 2차 가해 의혹을 규명하는 데 주력하고 있지만 아직 수사는 답보상태다.

안미영 특검팀은 지난해 6월 전익수 공군 법무실장에게 가해자 장 모 중사의 구속영장 실질심사 진행상황을 알려줬다는 등의 혐의를 받는 국방부 고등군사법원 소속 군무원에 대해 공무상비밀누설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지난 7일 김세용 서울중앙지법 영장 전담 부장판사는 이를 기각했다. “일부 범죄 성립 여부에 대해 다툼의 여지가 있고 증거인멸과 도망우려가 충분히 소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첫 구속영장 청구가 기각되자 법조계 안팎에선 수사 동력이 바닥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지만 이씨는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이주완씨는 고(故) 이예람 중사의 빈소인 국군수도병원의 장례식장 101호 상주방에서 산다. 상주방에 붙어 있는 문구. 김남영 기자


“진실 밝혀지기 전엔 안 떠나”

이 씨는 “(연장되면) 아직 한 달 정도가 더 남아있다”며 “차후 수사에서 다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공군과 국방부는 조사 과정에서 유족들 상대로 한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특검팀이 7시간이나 할애했다는 게 믿음의 근거였다. 이씨는 “내가 예람인데, 예람이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있는데 군은 제대로 묻지도 않았다”며 “내가 언론 등에 군 수사책임자였던 전익수 법무실장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밝힌 바 있는데, 전 실장은 끝내 조문도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특검이 군무원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기 전날 예람이가 다섯 살 모습으로 자기 오빠와 같이 꿈에 나왔다”며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예람이와 함께 이곳에 머물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가 머무는 101호실 상주방에는 간단한 이부자리, 옷가지들과 함께 약봉투들이 쌓여 있었다. 2005년 췌장 이식을 받은 이씨는 요즘도 한 끼에 10알 정도 약을 먹어야 버틸 수 있다고 한다.

김남영 기자 kim.namyoung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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