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진실'을 인정하는 것"
한국 법정서 증언하는 응우옌
여덟 살 때 경험한 ‘하미 마을 학살 사건’ 2020년 손해배상 청구소송
9일 서울중앙지법 출석…베트남인 피해자로는 첫 대면 증언 나서
“유감”이라면서도 확답 안 주는 한국 정부에 “사과해야 진정한 위로”
비가 추적추적 내린 8일 오전 10시30분. 검은 정장 차림의 응우옌 티 탄(62)이 서울 중구에 있는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사무실을 찾았다. 베트남전 때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유족인 그는 목이 메어 말했다. “한국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인정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학살 목격자이자 남베트남군 민병대원으로 활동한 응우옌 득 쩌이(82)는 조카인 티 탄 곁에 말없이 서 있었다.
이날 정근식 진실화해위원장과 만난 티 탄은 지난 4월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하미 마을 학살사건’에 대한 빠른 조사 개시 결정을 요구했다.
그가 살았던 퐁니·퐁넛 마을 인근인 하미 마을에서도 한국군 학살 피해자가 발생했다. 베트남 현지에 있는 유족 5명은 지난 4월 진실화해위에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정 위원장은 비공개 면담에서 “유감”이라면서도 “진실 규명 결정 여부는 확답을 못 드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면담을 마친 티 탄은 기자들과 만나 “얼마 전 하미 학살 희생자 135명 이름이 적힌 위령비를 찾아갔다. 대부분 노인, 여성, 어린이들이었다”며 “한국 정부가 사과하지 않아 많이 속상하다. 진실 인정과 사과를 해야 피해자를 진정 위로할 수 있다”고 했다. 티 탄은 2020년 4월 한국 정부를 상대로 3000만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 후 2년 넘게 법정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그가 여덟 살 소녀였던 1968년 어느 날, 베트남 중부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에 한국군 청룡부대가 들이닥쳤다. “메(어머니), 찌(언니), 꼬(이모)….” 그가 베트남어로 열거한 희생자는 어머니, 언니, 남동생, 이모, 이종사촌 동생 등 5명이다. 사망 당시 남동생은 6세, 사촌동생은 8개월 신생아였다. 퐁니·퐁넛 마을에서 70여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 역시 배에 총을 맞아 큰 상처가 남아 있다. 한쪽 귀는 못 듣는다.
청룡부대는 베트남 인민군의 대공세에 맞서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가 2000년 기밀 해제한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 보고서에는 “1968년 2월12일 한국 해병 2여단 1대대 1중대가 마을 주변을 일렬종대로 지나던 중 저격을 받자 마을을 공격, 베트남 여성과 어린이들이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었고, 해병 1명이 부상당했다”고 적혀 있다.
티 탄은 그날 이후 한국인 남성을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가 소송에 나선 이유는 ‘나만의 재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2015년 얼굴을 공개하고 피해 사실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2018년 한베평화재단이 주최한 평화시민 모의법정에 나와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증언했다. 2019년에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을 요청하며 피해자 103명의 서명이 담긴 청원서를 청와대에 냈다. 국방부는 “한국군 전투 사료 등에는 주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해 11월 티 탄이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4번째 변론기일에선 퐁니·퐁넛 마을에서 작전을 수행한 참전 군인 류진성씨가 법정에 나와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라며 학살 당시 주변 상황을 증언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 측 변호인은 “류씨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티 탄이 직접 9일 서울중앙지법 재판정에 출석해 베트남인 피해자로서는 처음으로 대면 증언을 하게 됐다.
티 탄은 오는 12일까지 한국에 머물며 베트남전 피해를 알리고 한국 정부의 사과를 촉구할 예정이다. 10일에는 국회를 방문해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실 규명 특별법’ 입법을 촉구한다. 11일에는 용산구 전쟁기념관을 둘러보고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 같은 날 인근 ‘서울시공익활동공간 삼각지’에서 시민들과 좌담회도 열 계획이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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