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이 일제 항복 일등공신이라는 '잘못된 서사' 깨고 천황제 주목을

한겨레 2022. 8. 8.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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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패전 76주년인 지난해 8월15일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소재 야스쿠니신사에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방문자들이 참배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극동 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을 거쳐 교수형을 당한 도조 히데키 등 태평양 전쟁의 A급 전범 14명이 합사돼 있다. 도쿄/연합뉴스

[왜냐면] 미야우치 아키오 | 시민모임 독립’ 논평위원

8월15일은 광복절이다. 일본은 이날을 ‘종전’기념일이라고 한다. 1945년 8월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8일에는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결국 8월15일 히로히토 천황은 ‘종전의 조서’를 발표한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시작된 15년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종결이었다.

얼마 전 ‘시민모임 독립’ 회원들과 함께 서울 독립문 근처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전시를 관람했다. 해방 과정을 다룬 영상에서 원폭이 투하됐기에 일본이 항복한 것으로 묘사됐는데, 이는 오해 소지가 있다. 이 영상뿐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일제 항복은 원폭이 결정적인 계기였던 것으로 설명된다. 물론 시계열로 보면 그런 설명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정확한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런 서사의 폐단도 만만치 않다.

1931년 만주사변은 15년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시작이었다. 천황제를 등에 업은 일본 군국주의 광풍의 서막이었다. 1941년 진주만 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애초부터 승산 없는 무모한 짓이었다. 일제는 1942년 미드웨이해전으로 기세가 꺾이고, 1943년 과달카날 패전으로 수세에 몰렸다. 1943년 도쿄에서 대동아회의를 열고 대동아공동선언을 채택한 것도 점령지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운동을 무마하려는 시도였다.

1944년 4월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이 황족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에게 보낸 편지는 패전을 실감한 당시 일본 지배세력의 속내를 드러낸다. 이 편지의 핵심은 도조 히데키로 대표되는 군벌, 특히 육군에게 전쟁의 책임을 전가하자는 것, 천황제라는 국체는 유지해야 한다는 정치 방침이었다. 이후 1년 이상 절망적인 전황 속에서 일본 지배층은 오로지 지배체제 유지에 골몰했고, 1944년 6월 사이판, 1945년 2월 이오섬(유황도), 4월 오키나와에서 패배하면서 막대한 희생이 이어졌다.

당시 일본 지배세력에게 중요한 것은 국민의 목숨이 아니라 천황제 유지였다. 메이지 유신을 추진한 지배계층은 천황을 신으로 승격시켰다. 국민을 신의 적자로 만들고, 신에게 충성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했다. 이렇게 일본인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천황제는 자신들의 안녕과 부를 지킬 수 있는 기제였다. 한편 미국은 일본이 항복 조건으로 내세운 천황제 유지 요구를 거부했다.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고,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물(원자폭탄)을 선보일 명분을 얻게 된다. 8월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됐지만 일본은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결정적인 것은 소련의 선전포고였다.

천황의 종전 조서는 더이상의 국민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옥쇄’(玉碎)는 명예고, 포로가 되어 삶을 이어가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지배세력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일본을 지키는 것이 미덕이라고 강변했다. 국민 희생을 막기 위한 항복이라면, 적어도 패색이 완연하던 1944년 초에 항복해야 했다. 피해자 숫자로 말한다면, 본토 공습과 오키나와 민중의 피해가 원폭을 능가한다. 원폭으로 일본이 항복했다는 서사는 미국 승리만을 강조하고, 일본 안으로는 천황의 자비로운 마음을 증명했고, 밖으로는 ‘원폭 피해국가 일본’이라는 분장놀이의 근거가 됐다.

더불어 일본 천황의 전쟁 책임은 은폐됐고, 민간인 대량학살이라는 미국의 책임도 가려지게 되었다. 끈질기게 일제에 저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포함한 조선인과 중국인, 아시아태평양 사람들이 일제를 이긴 것이 종전의 본질이었지만, ‘원폭 서사’는 이를 가렸다. 종전 이후 천황과 맥아더 장군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천황제는 유지됐고 천황은 전범으로 처단되지도 않았다. 천황은 자신의 전쟁범죄로 인해 희생된 일본 국민과 아시아인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일본의 문제는 다시 천황제다.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극우세력이 전가의 보도로 활용하는 것이 천황제다. 1923년 ‘대역 사건’으로 투옥되어 스물세살로 불꽃의 삶을 마감한, 대한민국이 독립운동가로 서훈한 가네코 후미코는 법정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지상의 평등한 인간 생활을 유린하고 있는 권력이라는 악마의 대표가 천황이며 황태자다. (…) 자기를 희생하고 국가를 위해 모든 힘을 다한다는, 이른바 일본의 국시로 간주돼 찬미되며 고취되는 저 ‘충군애국’이라는 사상은 사실상 그들 소수 특권계급의 이익을 위한 방편으로 아름다운 형용사로 포장한 것, 즉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희생시키려는 욕망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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