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공급측 경제학이 필요하다

한겨레 2022. 8. 8.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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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지난달 27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 헬스케어 혁신파크에서 열린 제4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세상읽기] 이강국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

공급측 경제학은 보수의 전유물이었다. 1980년대 미국 레이건 정부는 감세와 규제 완화를 하면 기업의 투자와 노동 공급이 늘어나 성장이 촉진되고 세수도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주술경제학이라는 신랄한 비판을 받았고 현실에서도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국의 윤석열 정부가 제시한 낙수효과 경제학이 바로 그것이다. 프리드먼의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우리 대통령의 생각은 아직 40년 전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그러나 정부가 총수요 관리만이 아니라 공급측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다. 이제 미국에서는 진보의 공급측 경제학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재정확장과 함께 경쟁 촉진과 노동자들의 협상력 강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배경으로 경기가 급속히 회복되고 실업률이 하락했으며 임금인상으로 불평등도 개선됐다.

하지만 최근 인플레이션은 바이드노믹스를 실패로 만들고 있다. 따라서 총수요 확장으로 이력효과를 극복해 성장을 촉진하고자 한 고압경제 전략의 성공을 위해서도 공급능력과 인플레이션 문제에 관한 구조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바이든 정부도 ‘더 나은 재건’이라는 의제 아래 대규모 공공투자계획을 제시하며 공급능력 확대가 인플레 억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간접자본 법안은 통과됐지만, 기후위기 대응과 무상교육 등을 위한 야심 찬 계획은 민주당 내 보수정치인의 반대에 직면하여 난항을 겪었다.

그럼에도 진보세력이 공급측 정책을 강조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에즈라 클라인은 미국의 진보는 보편적 의료보험, 사회보장, 최저임금 등 주로 수요측에만 주목했고 공급이나 혁신에는 무관심했다며 이는 “좌파의 경제적 실수”이고 공급측 진보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실제로 미국에서 많은 소비재 상품의 가격은 기술진보와 함께 하락해왔지만, 의료나 주택, 교육 부문 등은 생산성 상승이 더디고 공급이 제한적이어서 비용이 계속 높아져왔다. 경제학자 보몰이 “비용질병”이라 부른 현상이다.

그에 따르면 새로운 진보는 이런 서비스의 생산성을 높이고 비용을 낮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주택을 비싸게 만드는 용도지역 설정 규제 등을 개혁하고 대규모 공공투자로 값싸고 친환경적인 에너지 공급을 늘려야 한다. 또한 의약품 개발 정부지원과 더불어 지식재산권 보호 축소 혹은 가격통제를 통해 의약품 가격을 인하해야 한다. 저소득층의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주택과 에너지, 의료비 하락은 소득분배를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

한편 최근의 경제학 연구들도 사회복지제도가 노동 공급과 생산성 상승을 촉진했다며 진보판 공급측 경제학을 지지한다. 1990년대 근로장려세제 확대는 싱글맘 고용을 크게 증가시켰고 육아보조 제도는 여성의 경제활동을 촉진했다. 저소득층 식료품 구입비 지원제도는 장기적으로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적자본에 도움이 됐다. 이를 고려하면 바이든 정부가 추진하는 근로장려세제 확대와 조기아동교육 그리고 자녀세금공제 정책은 노동 공급을 늘리고 아동빈곤율을 줄이며 인적자본을 확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옐런 재무장관은 미국의 새로운 정책지향은 진보적인 방식으로 노동 공급을 확대하고 인프라를 개선하여 생산성과 성장을 높이고 동시에 인플레 압력을 낮추는 현대적인 공급측 경제학이라고 주장했다. 바이든 정부의 공공투자 계획도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최근 상원을 통과하여 진전을 이뤘다. 이 법은 기후위기에 대응해 신재생에너지 생산과 투자 그리고 전기차 구입에 대한 세금공제 등을 포함한 4330억달러 규모 재정지출 계획을 제시한다. 또한 15% 최저법인세율 도입과 처방의약품 가격 인하 등을 통해 7390억달러의 재정수입을 증가시켜 인플레이션에 대응할 계획이다. 원안보다 많이 축소됐고 여러 한계도 있지만, 이런 노력이 성공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한국의 진보도 경제의 공급측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보수 정부가 감세와 규제 완화에 기초한 시대착오적인 공급측 경제학에 매달리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의 진보세력도 새로운 공급측 경제학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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