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임신중단권' 폐지 한 달.. 전쟁터가 된 여성들의 몸[플랫브리핑]

심윤지 기자 2022. 8. 8.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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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 6월24일 여성의 임신중단을 헌법적 권리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했습니다. 이에 따라 임신중단의 위법 여부 결정 권한은 각 주(州)로 넘어갔는데요. 미국 각 주들이 관련법 논의를 본격화하면서 찬반 진영의 소송전과 혼란도 거세지고 있습니다. 미 연방대법원의 임신중단권 폐지판결 이후 46일이 지난 지금, 플랫팀이 그동안의 상황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여성의 임신중단권리 인정을 요구하는 미국 시민들이 7월 25일(현지시간) 인디애나주 인디애나 폴리스의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인디애나주 상원 회의 동안 구호를 외치고 있다. 게티이미지
‘보수 텃밭’ 캔자스에서 지켜낸 임신중단권

보수 성향 주들에선 ‘임신중단 금지법’을 공식적으로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한창입니다. 지난 5일(현지시간)에는 인디애나주가 대법원 판결 이후 처음으로 임신중단 금지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인디애나주는 1973년 ‘로 앤 웨이드’ 판결 이후 임신중단이 불법이 된 첫번째 주가 됐습니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에릭 홀콤 인디애나 주지사(공화당)는 이날 대부분의 임신중단을 금지하는 주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법안은 공화당이 다수인 인디애나주 상·하원에서 62 대 38(하원), 28 대 19(상원)로 통과됐고, 이를 주지사가 바로 승인하면서 내달 15일부터 시행될 예정입니다.

인디애나주의 새로운 법은 대부분의 임신중단을 불법으로 규정합니다. 성폭행이나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수정 후 10주 이내), 산모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 태아가 치명적인 기형일 때 등 일부 사항에 대해서만 예외를 인정합니다.

성폭행이나 근친상간 피해 등 예외적인 경우를 대상으로 한 임신중단 시술은 병원이나 병원 소유의 외래진료센터에서만 가능하게 됩니다. 기존에 임신중단 시술을 해 왔던 클리닉들은 면허를 잃게 됩니다.

미국 캔자스주에서 열린 주 헌법 개정 찬반투표에서 임신중단권을 종전대로 유지한다는 여론이 승리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두 여성이 얼싸안고 감격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변’이 일어난 주들도 있습니다. 캔자스주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직후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주 헌법 개정안에서 삭제하는 개정투표를 추진했습니다. 캔자스주는 공화당의 텃밭로 불릴 정도로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이번 투표에서도 역시 임신중단 반대 진영이 바라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죠.

하지만 2일(현지시간) 발표된 개표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개헌 반대가 58.8%로 찬성(41.2%)을 압도하며 큰 표 차로 부결된 것인데요. 11월 중간선거 예비선거와 함께 진행된 이번 개정투표는 참가 인원도 역대 어느 예비선거보다 월등히 많았다고 합니다.

민주당은 선거 결과에 크게 고무된 분위기입니다. 야당인 공화당은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와 기름값 등 경제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고 있는데, 임신중단이 새로운 승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죠.

하원 선거위원회 위원장인 션 패트릭 멀로니 의원은 “이것은 ‘게임 체인저’와 같다”면서 “캔자스주 투표 결과는 이번 가을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관한 모든 가설들을 덜컥거리게 만드는 지진이나 다름없다”고 말했습니다.

여성들의 안전한 임신중단 권리가 입법으로 보장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여성들의 몸이 ‘게임 체인저’로 불리는 지금 상황이 씁쓸합니다.

민주당 정부 “행정소송 불사하겠다”

미국 법무부는 지난 2일(현지시간) 여성의 임신중단를 사실상 전면 봉쇄하는 법을 시행한 아이다호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로 앤 웨이드’ 판결 폐기 이후 미 연방정부가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주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미 법무부는 아이다호주를 관장하는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임신 6주가 지난 여성에 대해 임신중단을 금지시킨 아이다호주의 법률은 모든 미국인이 의료비 납부 능력 여부에 상관없이 응급 상황에서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를 보장한 연방 법률인 응급의료법(EMTALA)에 위배된다”고 밝혔습니다.

아이다호주에서는 미 대법원이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를 폐기할 경우 임신 6주가 지난 여성에게 임신중단 시술을 한 의료진을 처벌토록 하는 이른바 ‘트리거’ 법률이 제정돼 있었습니다.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 미리 낙태금지법을 만들어놓은 보수 성향의 12주 중 한곳이었죠.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오는 25일부터 시행되는 이 법률은 자궁 외 임신, 임신중독 또는 유산으로 인한 합병증 등을 겪는 환자 등 응급 상황에 처한 임신부에 대해서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의해 원치 않은 임신을 한 경우는 예외를 인정하긴 하지만, 그러려면 의료진에게 경찰이 작성한 문서를 제시해야 하고요.

미 법무부는 법원이 아이다호주의 법률을 ‘사전에’ ‘영구히’ 중단시켜줄 것을 원한다고 밝혔습니다. 메릭 갈랜드 법무부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오늘 법무부의 메시지는 명확하다”면서 “만약 생명이 위협을 받는 환자가 응급실에 올 경우 병원은 환자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치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갈랜드 장관은 “여기에는 의학적으로 필요할 경우 임신중단도 포함된다”고 강조했다.

브래드 리틀 아이다호 주지사는 법무부가 제기한 소송에 대해 대해 주정부의 권한을 침해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절반 가까운 주들이 임신중단을 제약하거나 금지시킬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법무부가 각 주의 트리거 법률 시행을 막기 위해 소송을 차례로 제기할 경우 연방정부와 주정부 간 소송전이 잇따를 전망입니다.

민주당 지지자들 “대통령이 움직여라”

현재 미국 연방대법관들을 정치성향으로 분류하면 9명 중 6명이 보수, 3명이 진보입니다. 연방대법관은 종신직이기 때문에 교체 시점을 예상할 수 없는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신의 집권 기간 동안 무려 3명의 대법관을 임명 강행하면서 ‘보수 우위’의 구도가 만들어졌죠.

반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민주당 소속입니다. 상원과 하원 모두 민주당이 다수당이고요. 미국인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다수당의 뜻과도 반대되는 이러한 정책을 대법원이 결정하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문제제기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임신중단권을 지지하는 민주당 핵심 지지층은 “대통령과 의회가 대책을 마련하라”며 연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민주당은 행정명령, 소송 등의 방법을 동원해 ‘임신중단 전면금지’라는 최악의 상황은 막아보겠다는 입장이고요.

📌보수가 원하는 대로 판결…미 연방대법원의 독주

크리스티 노엠 사우스다코타 주지사(오른쪽)가 지난달 13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10세 소녀가 강간으로 생긴 아이를 낳아야 하나’라는 진행자의 질문에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며 임신중단 금지를 옹호했다. 왼쪽은 CNN 진행자. CNN 방송화면 갈무리

바이든 대통령은 임신중단이 전국적 이슈로 떠오를 때마다 행정명령을 내놓으며 쟁점화에 나서는 모양새입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은 약물을 활용한 임신중단 접근권 보호 방안 계획 등을 향후 30일 내에 대통령에 보고해야 한다”는 내용의 첫번째 행정명령은 지난달 8일 발표됐습니다. 오하이오주에서 성폭행으로 임신한 10세 피해자가 인디애나주로 긴급 원정수술을 떠나야 했던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일었던 상황이었죠.

📌성폭행으로 임신한 10세 피해자도 ‘수술 거부’… 미국이 들끓었다

캔자스주에서 임신중단법 부결 소식이 전해진 지난 3일에도 두번째 행정명령이 통과됩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임신중단을 위해 다른 주(州)로 이동하는 여성을 지원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는데요. 여성들의 이동 지원에 필요한 자금은 메디케이드(저소득층 대상 의료 지원 제도) 재원으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강간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 여성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 등을 제외하고는 연방 차원의 낙태 관련 지원을 금지하는 기존 의회 지침(하이드 수정안)과 상충하는 부분이 있어, 실효성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인기 반토막 난’ 미국 대법원

미 연방대법원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뢰도는 급락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20일(현지시간) 마켓 로스쿨은 지난 5일부터 12일 미국의 성인 100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1%가 대법원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대법원을 지지한다는 응답은 전체의 38%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1년 전 조사에서 60%가 지지 의사를 밝힌 것과 비교하면 크게 하락한 수치입니다.

임신중단권 폐지 결정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64%가 반대 입장을 밝혔고, 찬성은 36%에 불과했습니다다. CNN은 “이번 조사는 대법원에 대한 미국인의 지지가 급속도로 하락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며 “전통적으로 미국인은 백악관이나 의회보다 대법원에 높은 신뢰를 보여왔다”고 지적했습니다. CNN 최근 조사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 지지율은 38%, 의회에 대한 지지율은 18%였습니다.


김재중 워싱턴 특파원 hermes@khan.kr
이재덕 기자 duk@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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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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