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성매매 피해→반신마비..일상까지 1년, 혼자 아니었다

이우연 2022. 8. 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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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찰이다]나는 경찰이다④ㅣ황해솔 수원남부경찰서 경장
범죄피해자 일상회복 돕는 피해자전담경찰
지난달 7일 경기 수원남부경찰서에서 피해자전담경찰 황해솔 경장이 범죄 피해자와 전화상담을 하고 있다.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지난해 1월 경기 수원남부경찰서 청문감사실에서 일하고 있던 황해솔 경장 앞에 놓인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렸다. 수화기 너머 여성청소년과 수사관은 ‘미성년자 여성이 필로폰을 복용한 사건이 있다’며 사건 개요가 담긴 문서를 보내왔다.

피해자 ㄱ양은 마약 후유증으로 뇌혈관이 터져 몸 오른쪽에 마비가 온 상태였다. 집을 나와 같이 동거하던 20대 남성 ㄴ씨가 사건의 시작에 자리하고 있다.

친구 소개로 만난 ㄴ씨는 ㄱ양에게 마약 투약과 성매매를 강요했다. 취약한 상태의 미성년자에게 금전적 도움을 주고 친밀하게 대한 뒤 성범죄를 저지르는 전형적인 ‘그루밍 범죄’였다.

■ “사건이 종결돼도, 피해자 인생은 종결되지 않잖아요”

통상 경찰의 할 일은 수사가 마무리되고 사건이 종결되는 순간 끝난다. 피해자전담경찰관인 황 경장의 일은 사건종결부터 시작된다. 범죄 피해자의 심리적·경제적 지원을 돕는 것이 그의 일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종결돼도, 피해자의 인생은 종결되지 않잖아요. 길게는 몇 년 동안 피해자 또는 피해자 가족이 일상으로 돌아갈 때까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죠.”

ㄱ양도 일상을 되찾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황 경장은 병원에 입원 중이던 ㄱ양과 첫 통화에서 느꼈던 막막함을 아직 기억한다. 황 경장의 질문에 ㄱ양은 단답형으로 답하고, ㄴ씨 관련 질문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ㄱ양은 경찰 조사에서도 오히려 ㄴ씨를 감싸고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ㄱ양에게 ㄴ씨와의 과거와 결별하고, 재활치료를 받을 동기를 심어줘야 했어요. 처음에는 통화로 가벼운 일상 얘기를 나눴어요. 점차 저에게 마음을 여는 게 보여서, 나중에는 학교 자퇴 후 못 만난 친구들이 보고 싶지 않냐는 얘기도 툭 꺼냈죠. 친구들 얘기를 한참 하다가, 사실 자신은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는 얘기까지 하더라고요.”

이후 다시 진행된 경찰 조사에서 ㄱ양은 ㄴ씨를 가해자로 인정했다. 황 경장 도움으로 ㄱ양은 병원비와 생계비 등을 지원받았다. 약물중독 자조 모임에도 나가기 시작했고, 올해부터는 재활병원도 다니고 있다. “피해자가 바쁘다고 제 전화를 안 받기 시작하면 저는 그제야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구나 안심해요. ㄱ양도 그랬어요.” 수원지법 형사15부(재판장 이정재)는 지난달 14일 ㄴ씨에게 징역 9년6개월을 선고했다.

■ 범죄 피해자 일상 회복을 설계하다

황 경장과 같은 피해자전담경찰은 전국 258곳 경찰서에 배치돼 있다. 경찰은 2015년 범죄피해자 보호 원년의 해를 선포하며 심리학 전공자들을 경장 계급으로 특별채용하기 시작했다. 범죄자 검거에 초점을 맞췄던 경찰이 범죄 피해자가 겪는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와 수원자살예방센터 등에서 근무해온 황 경장이 경찰이 된 계기였다. 그는 지구대와 경찰서 형사과 근무를 마치고 현재 수원남부경찰서에서 피해자전담경찰로 일하고 있다.

황 경장에게 닿는 피해자들은 주로 5대 강력범죄(살인, 강도 등 흉악범죄, 성폭력, 약취·유인, 방화) 피해자이지만 최근에는 스토킹, 데이트폭력, 가정폭력, 아동학대 등 ‘관계성 범죄’ 피해자들도 늘고 있다. 후자의 경우 범죄피해자 안전조치(신변보호) 등의 보호는 물론이고 가해자와의 관계 단절이라는 임무가 더해진다. 황 경장은 “관계성 범죄 피해자들은 종종 가해자의 가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 결국 관계를 끊지 못하고 2차 피해를 당하기도 한다. 가해자의 접촉에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냉각기를 갖도록 설득하는 것도 피해자전담경찰의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 밖에도 치료비와 유족구조금, 장례비, 이전비, 생계비, 학자금 등 필요한 항목을 추려내 범죄피해자지원센터로부터 지원받도록 하고, 심리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 등을 연결하는 것도 그의 일이다. 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위해 필요한 조처를 설계하는 일이다.

피해자전담경찰인 황해솔 경기 수원남부경찰서 경장.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 잔혹한 영화가 끝날 때까지, 피해자 옆에서

황 경장의 경력이 가장 빛을 발할 때는 사건 초기에 피해자의 심리적 안정을 도울 때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범죄 피해자들은 사건이 벌어지고 3개월가량의 골든타임을 놓치면 일상 회복에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아무리 잔혹한 영화를 보더라도 영화가 끝난 뒤 밥을 먹고 잠이 드는 등 일상을 살아가잖아요. 범죄 피해자는 그러지 못해요. 계속 영화의 잔혹한 영상을 반복 재생하는 것과 같은 상태라고 할까요.”

황 경장과 연결된 범죄 피해자 10명 중 6∼7명은 그와의 상담을 마지막으로 별도의 심리 상담을 받지 않지만 간혹 장기 상담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황 경장 혼자서 수원남부경찰서 범죄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보니, 이럴 경우에는 범죄피해 트라우마 통합지원기관인 스마일센터로 연계해 심리 상담을 지원한다.

그럼에도 황 경장이 직접 모니터링하며 관리해야 하는 피해자도 있다. 지난 3월 수원남부에서 동거인에 의해 살해와 시신 유기를 당한 김아무개(사망 당시 23)씨의 어머니가 그렇다.

황 경장은 유가족을 대상으로 집단 애도 상담을 진행하고 이들을 스마일센터에 연계하는 것은 물론, 사건기록에 첨부되는 범죄피해평가를 시행해 향후 재판부가 양형에 고려할 수 있도록 했다. 다행히 김씨의 아버지와 형은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직도 아들이 죽던 그 날에 머물러 있다. 이날 아침도 어머니와 통화를 나눴다는 황 경장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 있을 재판을 앞두고 어제도 맥주 네병을 마시고 주무셨다고 하더라고요. 술을 안 마시면 도저히 잠이 안 온다고….”

그는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하지 않는 한 자신이 맡은 사건은 피의자가 검거되고 처벌을 받아도 ‘미결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일상을 회복할 때까지는 지원 실패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을 해버리면 제가 먼저 어머니를 포기할 것 같아서요. 비록 법원 가실 때 미니 선풍기 잘 챙기고 가시라는 말 밖에 건넬 수 없었지만요.”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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