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학자의 꽃·풀·나무 이야기..'식물일지'는 나의 해방일지

조철희 기자 2022. 8. 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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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131쪽 경남 창녕군 옥천리 팽나무 고목 사진
우영우 팽나무, 팽나무 박사 허태임
최근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등장한 '팽나무'가 큰 화제였다. 여주인공이 걸고 나온 목걸이도 아니고 시청자들이 나무에 열광한 건 드문 경우였다. 촬영지인 경상남도 창원 모처에 관광인파가 몰려들었다.

드라마에선 '소덕동'이라는 마을이 도시개발 사업에 팽나무와 함께 사라질 위기였는데, 팽나무가 극적으로 천연기념물이 되면서 마을도 팽나무도 살아남아 시청자들의 감동을 샀다.

그런데 사실 팽나무는 누구나 다 익숙한 식물은 아니다. 나무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사람도 있고, 이 드라마에서 팽나무를 처음 본 사람도 적잖다. 드라마 다시보기 대신 한 식물학자의 팽나무에 대한 설명과 묘사로 팽나무를 눈앞에 그려본다.

내가 자란 시골 마을 어귀에는 팽나무 고목 한 그루가 서서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덩치가 몇 아름이나 되는지 두 팔을 벌려 한참을 재보거나, 땅에 떨어진 꾸덕꾸덕한 나무껍질로 탑을 쌓기도 하고, 제법 달콤한 열매를 따 먹어도 보고, 자잘한 씨앗을 하나둘 헤아리다 보면 금세 저녁이 찾아왔다. 기쁜 마음을 나누는 것도 속상한 마음을 달래는 것도 팽나무 앞에서였다.

김영사에서 발행한 신간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이하 초록목록)의 한 대목이다. 드라마에서처럼 가지와 잎을 웅장하고 아름답게 드리우며 마을을 지키고 있는 팽나무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책의 저자인 식물분류학자 허태임 박사는 지구상의 모든 식물을 연구하지만 특히 팽나무를 깊이 연구했다. 팽나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나라 보호수는 느티나무, 소나무에 이어 팽나무가 세 번째로 많다. 그는 <초록목록>에서 '인간과는 견줄 수 없는 시간을 살아온 팽나무를 생각하면 나는 지구상의 작은 생물이 된다'고 썼다.

'우영우 팽나무'가 화제되기 훨씬 전부터 식물을 좋아하는 대중들은 적잖았다. 플로리스트, 가드닝, 다육이, 숲해설가, 산림치유지도사, 나무의사 같은 말들이 어느새 우리 가까이에 있다.

하지만 허 박사는 '우영우 팽나무'를 비롯해 '유행처럼 퍼져나가는 오늘의 화려한 꽃 문화' 등이 반가우면서도 염려스럽다. 이것이 단시간 끓다가 마는 일이 될까봐서다. 식물이 소비와 향유만을 위한 소재로 인식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그는 <초록목록>에서 꽃과 풀과 나무를 어떻게 관상할까가 아니라 우리는 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그들과 공존할지를 이야기한다.

꽃, 풀, 나무 이야기
<초록목록>은 허 박사가 만나온 꽃과 나무와 풀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집이다. 주인공이 여럿인 옴니버스 영화 같이 '등장식물'도 많다. 세계가 주목했던 영화 <미나리>의 '주연식물' 미나리에 대한 허 박사의 일화를 옮겨본다. 영화를 본 이들은 할머니(윤여정)와 손자(앨런 김)가 미나리꽝에 함께 있던 장면이 절로 떠오를 것이다.

미나리를 심어 기르는 장소를 가리켜 할머니는 '미나리꽝'이라고 불렀다. '꽝'이란 땅이 걸고 물이 고이는 자리로, 미나리를 재배하기 위해 다듬고 관리하는 곳이다. 그 질펀한 땅을 엉거주춤 밟는 게 좋아서, 여린 미나리 잎이 내 종아리를 살살 건드리는 게 좋아서 나는 툭하면 맨발로 미나리꽝에 들어갔다. 거머리 조심해라. 물뱀 나온다. 서둘러 장화를 챙기며 외치던 할머니의 고함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허 박사는 미나리 같은 자생식물에 애정이 크다.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것은 자생식물,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것은 외래식물이다. 예로부터 부르던 이름이 그대로 내려온 '낙지다리'와 '쇠무릎'도 자생식물인데 실제로 낙지 다리와 소 무릎을 닮았다. 변산바람꽃도 허 박사가 좋아하는 자생식물이다.

1993년, 전에 없던 새로운 우리 식물이 발견돼 국내 식물분류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발견 당시만 해도 지구에서 유일한 자생지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 세봉계곡. 그래서 얻은 이름이 변산바람꽃. 눈이 다 녹기도 전에 언 땅을 뚫고 꽃을 피우는 식물로, 얼음 속에서 핀다는 복수초와 순위를 다투며 꽃소식을 전한다. 땅이 온전한 해빙을 허락하기도 전에 제 온기로 꽃을 피우고 서둘러 열매를 맺는 부지런함은 그들의 생존 무기가 되었다.

소설, 시 같은 과학책
오로지 식물 이야기이고, 그래서 생물 이론 설명도 많지만, 읽고 나서 과학책보다는 문학책을 본 것 같은 기분이다. 특히 저자의 문체가 매우 문학적이다. 아래는 연구 탐사 현장을 묘사한 대목인데 마치 한 소설에서 배경을 묘사하며 시작하는 첫 문단 같다.

경북 봉화의 최북단 작은 마을에서 두꺼운 외투 없이 밖으로 나선다. 마당가 유독 볕이 오래 머무는 자리에는 꽃다지와 쑥과 망초가 벌써 싹을 냈다. 밭둑에 바짝 붙어 자라는 물오리나무의 수꽃자루는 내 송곳니만큼 길어졌다. 산책길의 따뜻한 오후 볕이 춘분 때처럼 너그럽네, 혼자 중얼거린다.

허 박사는 책에서 시를 자주 인용했다. 그런 그의 문장 역시 시적이다. 이 책은 나무 그늘 아래서 시집을 읽는 듯한 기분을 준다. 허 박사 스스로 자신의 직업이 언어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세상 모든 식물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 식물들 사이의 관계를 밝히고, 종과 종 사이의 거리를 재단하는 식물분류학자이지만 '식물의 언어를 사람의 언어로 옮기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책 제목 '초록목록'(草錄木錄)처럼 식물의 삶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다. 꽃을 틔우고 꿀을 빚고 열매의 육즙을 채워 씨앗을 지키는 것이 식물의 생애라면 그것을 기록하는 것이 허 박사의 생애다. 그래서 그는 식물이 자연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헤아리고 또 헤아린다.

싸리와 참싸리는 폐허의 개척자와도 같다. 흙이 흙으로만 존재할 때는 결코 산이 만들어지고 숲이 우거지지 않는다. 풀과 나무의 뿌리가 흙을 그러쥐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가능하다. 초록이 사라진 헐벗은 땅에 가장 먼저 뿌리를 내리고 생존을 알리는 나무가 싸리와 참싸리다. 맵게 내리쬐는 태양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으며 애써 뿌리를 뻗어 흙을 거머쥐고 땅을 다지는 나무.

허태임 박사는 현재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보전복원실에서 우리 땅에서 사라져가는 식물을 지키기 위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사진제공=허태임 박사, 김영사
이 아름다운 행성
허 박사가 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식물의 '보전'이다. 그러나 이것이 식물학자의 평범한 주장으로만 여겨지지 않는 것은 기후변화가 정말 가까이 닥친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식물의 남방한계선이 계속 북쪽으로 향하는데,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기후위기를 딛고 식물은 살아남아야 한다. 식물이 사라지면 인간도 멸할 것이에, 식물이 먼저 살아야 한다. 식물 한 개체가 어느 곳에 뿌리내리고 살 때 그 주변 둘레에 같은 식물이 여럿 함께 살고 있다. 인간도 여기서 함께 살아야 한다. 허 박사는 '아름다운 행성' 지구를 오늘도 내일도 내내 조화롭게 지키고자 하는 것이 사명이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자연을 보호하고 탄소중립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 경제적 가치를 논쟁하는 단계를 넘어섰다. 허 박사는 식물 보전의 경제적 가치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우리 땅에만 자라는 고유식물은 생물이 국력이 되는 시대에 우리가 부릴 수 있는 필살기와도 같다. 조경수나 정원수로 적합한 우리 식물들, 신약과 화장품의 원료가 되는 생리활성 물질로서의 가능성이 우리 고유식물의 몸 곳곳에 녹아 있다. 과도한 개발을 줄여 우리나라 희귀식물의 서식지를 지키는 일, 불가피하게 개발이 진행될 경우 안전한 대체 서식지를 조성하여 그들이 삶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강구하는 일, 그들을 대량으로 증식하기 위한 기초연구를 확대하는 일은 우리나라가 생물자원 강대국이 되는 시대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허태임의 식물일지, 나의 해방일지
<초록목록>에는 전국의 여러 산과 섬, 해변이 등장한다. 저자가 누볐던 연구현장들인데, 아름다운 자연의 생생한 묘사에 읽고 나서 발길하고 싶은 마음이 크게 든다.

책만 읽어도 도시와 일상에 갇힌 기분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며 잠시나마 해방감이 든다. 허태임의 식물일지는 나의, 도시인들의 해방일지다.

캠핑장의 '불멍' 대신 '풀멍'은 어떨까. 허 박사도 '풀멍'을 자주하는지 '내가 동력을 얻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식물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는 예상 밖에 '먹방'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산과 들의 열매와 꽃과 잎은 사람들에게 항상 그 에너지를 두루 내어주기에 먹는 이야기가 안나올 수 없다. 얼레지잎, 지장나물, 우산나물, 삿갓나물, 회순 햇잎을 한데 데쳐서 간장만 약간 넣고 조물조물 무친다는 대목에선 잘 모르는 나물들이지만 군침이 돌았다. 아래 강원도 산나물 이야기는 더 그렇다.

마타리와 대나물과 곤드레(고려엉겅퀴)가 뒤섞인 묵나물밥, 곰취와 삼나물(눈개승마)과 명이나물(산마늘)과 잔대로 담근 각종 장아찌, 수리취와 서덜취와 비비추와 다래순을 각각의 나물성에 따라 양념을 달리하여 버무린 나물무침, 참나물과 참당귀와 어수리와 파드득나물 쌈채류... 할머니들의 밥상은 훌륭한 산나물 학습장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길을 걸으며 눈이 더 바빠졌다. 전에는 스마트폰을 보느라 바빴는데 지금은 길가의 꽃, 풀, 나무들마다 눈길이 더 간다. 여전히 이름은 모르겠지만 왠지 이제 우리 서로 아는 사이 같다. 지난 2년여, 코로나로 얼굴을 마주보길 피했던 이웃들에게도 마스크 위로 눈빛을 마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사람처럼, 고단하지만 보람 있는 생애를 사는 식물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식물은 아주 먼 과거부터 갖은 경험을 통해 이 행성에서 생존하기 위한 해법을 모색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며 삶의 지혜를 차곡차곡 모아온 우리의 선배다. 그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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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희 기자 samsara@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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