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환칼럼] 현상타파의 국제사회와 '원칙 있는' 외교
미·중·러, 자국문제 매몰 신냉전
韓, 강대국 휘둘리는 외교 안 돼
국제규범 기초한 소신 대처 필요
국제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유럽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비롯된 러시아와 새로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 간 대결 구도는 동아시아에서 대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 간 충돌로 이어졌다. 신냉전 질서하의 강대국 간 패권 전쟁의 서막이 오른 듯하다.
주요 강대국들이 규범에 근거한 국제질서에 의구심을 가지면서 국제체제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은 약화하고 있다. 약소국은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침해한 러시아의 침공을 비난하면서도 이를 막아내지 못한 서구 국가와 국제체제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미국 혹은 서구 국가의 경제제재와 군사개입이 무기력해 보이고 국제제도가 효능감을 상실하는 순간 남는 것은 무정부적인 세계이다.
현상타파의 분위기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주요 강대국은 각자도생의 길을 가게 된다. 이에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를 독재국가로 폄훼하고 자유진영과 구분하며 외교적 고립으로 몰아넣고자 하고 있다. 국제사회가 리더십 위기 속에서 불안정해지자 각국은 군사비 지출을 늘리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군사비 지출은 2021년에 처음으로 2조달러를 초과했다. 아울러 강대국은 각종 지역 경제·안보 블록으로 이합집산 하며 시대적 과제인 불균형 발전, 기후변화,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문제 해결 등에서 멀어지게 된다.
한편 우려되는 상황은 주요 강대국 지도자들이 국제질서의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시기에 자국 내 문제에 매몰되어 국제문제를 세계적 마인드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국내정치적 고려를 우선하는 사고가 강대국 간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미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는 최신 글에서 ‘어느 국가도 현 세계질서를 원치 않는다’는 제목하에 미국을 포함한 모든 강대국이 현상타파 세력이 되었다고 언급했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은 미국이 신냉전의 늪으로 중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기존 ‘하나의 중국’ 입장을 뒤흔드는, 패권 유지를 위한 또 다른 현상타파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이 미국의 외교적 행보를 막을 수 없었다면 대만해협에서의 군사훈련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 대만, 일본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자유진영의 안보동맹 결속을 가져온다는 측면에서 중국에 득보다는 실이 많은 시위(示威) 행동에 불과하다.
연례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관련 외교장관회의 참석차 캄보디아를 방문 중인 박진 외교장관은 힘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 변경은 용납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했다. 또한 대만해협과 동아시아 해역에서의 항행의 자유를 위협하는 중국의 일방적인 행위에 대해 규칙에 기반한 질서를 언급하며 국제규범에 기초한 문제 해결을 강조했다. 이는 신정부의 ‘원칙 있는’ 외교를 보여준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질서와 세계질서가 미국의 리더십 한계와 중국·러시아의 도전, 그리고 강대국 지도자들의 인기영합적인 국내정치적 고려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다. 현상타파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국익을 지키려면, 강대국에 휘둘리는 외교나 국내정치적인 인기영합 외교는 안 되며 ‘원칙 있는’ 외교만이 요구된다. 이것이 신정부가 이전 정부와 달리 외교적 성공을 할 수 있는 길이다.
이상환 한국외대 교수 전 한국국제정치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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