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 밀고' 의혹 '색깔론'으로 회피하는 김순호 경찰국장

박하얀 기자 2022. 8. 7.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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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단체' 딱지 뗀 인노회 "대공특채 규명해야"
김순호 초대 경찰국장이 2일 서울 종로 정부서울청사 내 경찰국으로 들어가고 있다. 경찰국은 총괄지원과·인사지원과·자치경찰지원과 등 3과 16명으로 구성된 가운데 이 중 12명은 경찰 출신이다. 이준헌 기자

초대 행정안전부 경찰국장에 임명된 김순호 치안감이 1989년 ‘대공특채’로 임용된 배경을 놓고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김 국장이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 활동을 하다 돌연 종적을 감춘 시점을 전후해 인노회에 대한 경찰 수사가 시작됐고, 인노회가 와해된 뒤 김 국장이 경찰에 특채됐기 때문이다. 인노회 회원들은 김 국장에게 “과거 행적에 대해 진실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김 국장은 경찰에 인노회 활동을 ‘고백’한 게 맞다면서도 “골수 ‘주사파’로 빠지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넘버 2’ 김순호 잠적하자 경찰 수사 본격화”

김 국장의 성균관대 81학번 동문과 인노회 회원들은 7일 경기 이천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제32주기 고 최동 열사 추모제를 열었다. 이들은 “김 국장은 1988년 인노회에 가입해 활동하다 1989년 치안본부가 인노회를 탄압할 무렵 자취를 감춘 뒤 그해 8월 경장으로 특채돼 군부독재정권 시절 암약했던 ‘밀정’으로 의심 받아왔다”며 “그가 치안본부의 부활이나 다름없는 경찰국 초대 국장이 된 것에 인노회 사건 관련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행정안전국 경찰국 초대 국장인 김순호 치안감의 1989년 경찰 입문 경위에 대해 당시 그와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인천부천민주노동자지회 회원과 성균관대 동문들이 명확한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 7일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열린 최동 열사 32주기 추모제에 유가족과 성균관대 동문들이 헌화와 묵념을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김 국장과 인노회의 인연은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국장은 1983년 3월 운동권 서클에 가입해 시위를 주도하다 군에 강제징집됐다. 같은 해 11월에는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끌려가 심사를 받고 ‘B급 관리 대상’으로 1502번이라는 관리번호를 부여받았다.

이후 김 국장은 서클 선배인 최동씨를 따라 인노회에 가입했다. 1988년 3월 결성된 인노회는 인천·부천 지역 노동자들이 모인 대중 노동운동 단체였다. 김 국장은 ‘김봉진’이라는 가명을 쓰며 부천 지역 조직 책임자인 ‘지구위원장’ 직위를 맡았다. 그는 공장에 위장 취업해 노조를 결성하는 방식으로 노동운동을 했다.

조직 내 ‘넘버2’로 불린 김 국장은 1989년 4월 무렵 돌연 자취를 감췄다. 김 국장의 행적이 묘연해진 시점을 전후해 인노회에 대한 경찰 수사가 전방위로 시작됐다. 1989년 1월 말부터 인노위 회원들이 치안본부에 연행됐다. 같은 해 4월28일 김 국장의 선배인 최동씨가 연행됐고, 김 국장이 관리한 부천지구 일반회원들까지 조사를 받았다.

주요 활동가들이 1989년 6월 기소돼 조직은 해체됐다. 인노회 사건 관련자 총 18명이 연행돼 15명이 구속됐다. 1990년 8월7일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던 최동씨는 분신 자살을 했다.

김 국장은 1989년 8월 대공특채로 경찰관이 됐다. 이성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김 국장은 당시 경찰공무원임용령에 따라 ‘대공공작업무와 관련 있는 자’로 분류돼 치안본부 대공 3과 소속으로 경찰 근무를 시작했다. 대공 3과는 노조활동을 하다가 대공분실에 끌려온 이들을 수사·관리했다. 김 국장은 2년 6개월 후인 1992년 2월 경사로 특별승진했고, 입직 5년 9개월 만인 1995년 5월 경위로 승진하는 등 진급 속도가 이례적으로 빠르다고 이해식 민주당 의원은 전했다.

“김순호 아니면 모를 정보 경찰이 모두 알아”

인노회 회원들은 과거 경찰 조사 때 김 국장만 알고 있을만한 정보를 경찰이 꿰뚫고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1989년 4월29일쯤 치안본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은 A씨는 “진술을 거부하니 경찰이 전체적인 조직표를 보여줬고 부천 몇몇 지역의 정보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며 “속속들이 알고 있어 황당했다. 진술 거부가 무의미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A씨는 “부천지구 밑에 분회가 8개 정도에 달하고 다른 분회 사람들은 명단을 모른다. 전체적으로 파악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김순호”라며 “경찰이 수사에 가장 중요할 수 있는 김순호 이름은 단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고 했다. 부천 회원으로 치안본부 조사를 받은 B씨도 “다른 분회 사람들을 오다가다 마주쳐도 본명이 뭔지는 잘 모른다”며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지구장(김순호) 정도 뿐”이라고 했다.

김 국장의 친구로 인노회 활동을 함께 한 C씨는 김 국장이 경찰이 된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고 했다. C씨는 “2014년 (김 국장을) 만나 ‘왜 그때 사라졌냐’고 물으니 ‘심경의 변화가 있어 사라졌다’고 답했다”며 “‘동형(최동)과 가까웠던 건 너인데 왜 (추모제 등에) 안왔냐’고 물으니 ‘절에 들어가서 경찰시험 공부하느라 세상과 담을 쌓아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고 전했다. 김 국장이 대공특채로 경찰에 첫 발을 들인 시점이 1989년 8월인 점을 감안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설명이다.

서울 용산구 갈월동 소재 전 치안본부 대공분실 모습. 경향신문DB

김 국장은 인노회 활동에 회의를 느껴 치안본부를 찾아가 고백했을 뿐 동료들에게 불리한 진술은 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운동권에서 활동한 경험으로 증거물 분석에 특기가 있어 대공특채가 됐다는 것이다. 언론 인터뷰에선 인노회를 ‘주사파’로 규정하며 “골수 주사파로 더 이상 빠지지 않기 위해 내 자신을 끊어내기 위해 (당시 경찰을) 찾아가게 된 것”이라고도 했다. 김 국장은 이날 경향신문에 보낸 문자메시지에서 “주사파 운동은 노동자의 삶과 권익을 신장시키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노동운동이 아니라 북한의 대남혁명노선을 실천하는 운동”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인노회에서 활동한 D씨는 “당시 치안본부에서 인노회 회칙에 조직의 목적이 분명히 나와있음에도 목적을 조작했다”며 “구속된 조직원들에게 조작된 목적이 맞다고 강요해 진술서를 쓰게 했고 ‘인노회는 이적단체가 맞다’며 기소했다”고 말했다.

D씨는 김 국장이 치안본부를 찾아가 인노회 활동을 ‘고백’했다고 밝힌 시점이 1989년 7월인 것을 두고는 “인노회 회원들이 구속된 게 그해 6월 끝났다”며 “7월에 갔다고 해야 자신이 구속된 회원들을 밀고한 게 아닌 것이 되니 맞춘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대법원은 2020년 재심 판결에서 인노회를 ‘이적단체가 아니다’라고 확정했다. 대법원은 “인노회는 인천과 부천 지역 노동자들의 경제적·정치적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대중적 노동단체로서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동조하는 활동을 단체의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고 보이고, 대한민국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위험성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박하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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