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82세 미국 노정객과 91세 대만 반도체 신의 만남

베이징=김남희 특파원 2022. 8. 7.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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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 기자

82세 노(老)정객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은 대만 방문 이틀째였던 3일 타이베이에서 대만 반도체의 살아있는 신(神)으로 불리는 모리스 창(장중머우) TSMC 창업자를 만났다. 1931년 중국 태생인 그는 전쟁의 기억을 안고 열여덟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 하버드대를 거쳐 MIT에서 기계공학 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자격 시험에서 두 번 연속 떨어진 후 공부를 접고 작은 반도체 회사에 들어갔다. 미국 반도체 설계·제조 기업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로 옮겨 빛을 보기 시작했다. 3년 후 회사는 그에게 스탠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딸 기회도 줬다. TI에서 해외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부사장까지 오른 후, 또 다른 반도체 회사를 거쳐, 50대에 대만 국책 공업기술연구원 원장으로 갔다. 56세이던 1987년, 반도체 설계 회사의 주문을 받아 제조만 하는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를 세웠다. 남의 설계를 받아 만들어주기만 한다는 개념이 낯설던 시절, 선뜻 투자를 하겠다는 회사가 없었다. 대만 정부가 초기 자본금의 절반을 댔다.

지금 TSMC는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기업이자, 세계에서 열번 째로 몸값이 비싼 회사(5일 시가총액 4493억 달러)다. 엔비디아·퀄컴·AMD처럼 반도체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fabless, 공장이 없단 뜻) 회사뿐 아니라, 아이폰을 만드는 애플과 같은 전자제품 제조사도 TSMC에 전적으로 의존하다시피 한다. 모리스 창은 2018년 은퇴했지만, 올해 91세의 노장은 대만 경제와 국가 안보 전장에서 여전히 현역으로 뛰고 있다.

펠로시는 모리스 창 전 회장뿐 아니라, 류더인(마크 류) TSMC 현 회장도 만났다. 미국 권력 서열 3위 펠로시가 중국의 거듭된 경고에도 대만 방문을 강행한 것도 모자라, TSMC 전·현직 회장을 동시에 만나자 중국은 격분했다. TSMC는 중국 반도체 공급망에서도 중요한 회사다. TSMC가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전 정부의 대중(對中) 반도체 수출 통제 조치에 따라 2020년 중국 화웨이에 반도체 공급을 중단한 후, 중국에선 중국 정부가 TSMC 통제권을 완전히 가져 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중국 국책 연구원 소속 경제학자가 “본래 중국에 속한 기업인 TSMC를 반드시 중국 수중에 빼앗아 와야 한다”고 공개 주장할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TSMC가 조 바이든 정부에서도 미국으로 기우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중국공산당 산하 관영 매체에선 TSMC를 향해 ‘잘못된 선택을 하면 회사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다’는 경고까지 나왔다.

펠로시가 1박 2일 빡빡한 일정 속에 TSMC 수장을 만나고 이를 공개한 것은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 깔린 행보다. 펠로시는 이번 아시아 순방 직전인 7월 29일 하원에서 미국 반도체 제조 역량을 키우고 미국 중심의 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반도체법(The CHIPS and Science Act)’을 통과시키고 서명했다. 미국은 이 법에 따라 국내 반도체 생산과 연구 등에 총 520억 달러(약 68조 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중 390억 달러(약 51조 원)가 미국에 반도체 제조 시설을 짓는 회사에 보조금으로 지급된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에선 강자지만, 제조는 대만·한국·중국에 밀리고 있다. 미국 제조업 쇠락은 모리스 창의 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리스 창은 미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반도체 제조 공장을 짓기로 결정한 후인 지난해 4월 대만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TSMC가 해외 부지를 물색할 때 미국이 값싼 토지와 전기 때문에 단연 눈에 띄었지만,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인 사이에 제조업 일자리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애리조나에서 유능한 기술자와 인력을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했다.

세계 반도체 부족 사태는 미국이 반도체 생산 주도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속화시켰다. 미국 내 반도체 제조망을 갖춰 중국 영향력 확장에 대비하자는 데 정치권이 단결했다. 야당인 공화당(50석)이 다수인 상원에서 이 법안이 찬성 64표로 통과된 것은 미 정치권이 중국 위협론을 얼마나 심각하게 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미국은 ‘중국 리스크’를 낮추기 위해 외국 기업에도 보조금 카드를 내밀며 미국에 공장을 지으라고 설득·압박했다. TSMC는 지난해 상반기부터 120억 달러(약 15조7000억 원)를 들여 애리조나주에 5나노미터 공정 반도체 생산 공장을 건설 중이다. 올해 5월 삼성전자도 앞으로 20년간 250조 원을 투자해 미 텍사스주에 반도체 공장 11곳을 신설하겠다는 계획을 텍사스 주정부에 제출했다. 현재 반도체 공장 2곳을 가동 중인 텍사스주 오스틴에 2곳을 추가하고, 위탁 생산 공장을 건설 중인 테일러에 9곳을 더 짓겠다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2일 “우리가 다시 게임에 돌아왔다”고 했다.

반도체법은 보조금을 받는 회사가 중국에서 최소 10년간 28나노미터 이하 반도체를 만들 수 없게 했다. 중국 반도체 제조 능력 발전을 억제하려는 의도가 명확하다. 중국에 공장을 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미국 보조금을 받을 경우 이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바이든 정부는 미국 중심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위해 한국·대만·일본을 묶는 이른바 칩포(chip 4) 반도체 동맹도 추진 중이다. 중국을 반도체 공급망에서 고립시키는 게 핵심이다. 대만·일본이 가입 의사를 밝힌 상황에서, 중국은 한국이 참여하지 않도록 견제하고 있다. 한국 반도체 수출의 60%를 차지하는 중국 시장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경고를 서슴지 않는다.

반도체는 국가 핵심 전략 자산이다. 미국과 중국 어느 편에 설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국익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경제 안보의 문제다. 주중 한국 대사관 고위 관계자는 5일 반도체가 한국이 미·중 압력을 이겨낼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우리가 서로 경쟁하는 강대국의 압력을 이기기 위해선 그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상관성을 창출해야 한다”며 “아마 물질적으로는 반도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생각보다 반도체라고 하는 것이 상관성의 이슈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는 굉장히 까다로운 이슈가 되고 있다”고 했다. 앞서 정재호 주중 대사는 1일 취임하며 “형세와 국면이 공히 결코 간단치 않은 상황으로 보인다”며 국익 수호를 강조했다.

반도체 패권을 쥐려는 미국, 반도체 굴기를 밀어붙이는 중국, 반도체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는 대만, 반도체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일본, 각국의 국가 간 경쟁과 연합이 세계 반도체 지형을 뒤흔들고 있다. 반도체는 기업만의 영역을 넘어섰다. 국가 대항전이다. 각국은 각종 특별법을 만들어 자국 반도체 기업을 지원하고 있다. 기업과 윤석열 정부가 함께 범국가적 전략을 짜고 실행할 때다.

류더인 TSMC 현 회장이 최근 반도체 기술 우위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 대목은 그런 면에서 읽어볼 만하다. 아래는 류 회장이 지난달 31일 방송된 CNN ‘파리드 자카리아 GPS’ 인터뷰에서 한 말의 일부다.

“자카리아(진행자): 왜 다른 곳이 당신들이 만드는 반도체를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7나노미터가 생각나는데. 미국엔 인텔처럼 훌륭하고 거대한 역사를 가진 회사들이 있다. 중국은 새 회사에 수백억 달러를 쏟아붓는다. 그렇지만 누구도 당신네가 만드는 반도체를 만들지 못한다. 왜 그런가?

류더인: 그들도 할 수 있다, 다만 몇 년 후에.

자카리아: 그렇지만 이 비즈니스에선 그게(시간) 모든 차이를 만들어 낸다.

류더인: 그렇다. 그게 차이다. 우린 반도체 기술 그 자체를 비즈니스로, 과학으로 여긴다. 단순 조립하는 작업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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