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한산대첩'이 있던 날, 육지에선 '웅치전투'가 있었다
430주기 웅치전투 기념식 열려..영화서도 재조명
1592년 음력 7월8일 조선을 침략한 왜군 수천명은 전주 점령을 위해 진안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고개인 웅치(현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 집결했다. 이치를 방어하고 있던 장군 권율은 김제군수 정담에게 웅치를 사수토록 명했다.
현재 ‘곰티재’라 불리던 웅치는 산세가 높고 험했다. 조선군은 3겹의 방어선을 치고 결사항전했다. 왜군 선봉대는 조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진격해 왔다. 1군과 2군이 결사적으로 그들을 막아 물리쳤다. 전열을 정비한 왜군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1선과 2선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곳을 지키던 장군 이복남은 후퇴했다. 왜군은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정담 진영으로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정담은 백마를 타고 오는 적의 장수를 쏘아 넘어뜨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왜군에게 포위 당해 고립위기에 놓이자 부하 장수가 정담에게 후퇴를 권했다. 정담은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는 없다”며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시위를 당겼다. 백병전이 시작되자 사력을 다해 싸우던 정담은 종사관 이봉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정담의 유해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김제 군민들이 웅치에서 찾아냈다. 갑옷에 새겨진 이름을 보고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왜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조선군의 담력과 용맹에 감동했다. 그들은 웅치재에 흩어져 있던 조선 군사들의 유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어 줬다. 그 위에는 ‘조선국의 충성심과 의로운 담기를 조문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고 쓴 푯말을 세워줬다. 웅치전투는 적을 무찌르지는 못했지만 전주에서 왜군을 막아낼 시간을 벌어줘 결국 전주성 점령을 단념케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영화 <한산-용의 출현>은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의 운명을 건 지상 최고의 해전, 한산대첩을 장엄한 스케일로 그려낸다. 이 영화의 한 장면에 웅치전투가 나온다. 1592년 음력 7월8일, 바다에선 한산대첩이 있었다면 육지에선 의병들이 관군과 합세해 왜군과 싸운 ‘육상의 한산대첩’ 웅치전투가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산대첩과 웅치전투가 벌어진 지 430년이 흐른 지난 5일 현지에서 산화한 선인들의 넋을 위로하고 민족자존을 되새기기 위한‘제430주기 웅치전투 기념식’이 열렸다. 해마다 치러진 기념식이지만 영화 <한산>이 웅치전투를 재조명하면서 이날 기념식 의미를 더 각인시켰다.
유희태 완주군수는 이날 “해상에 한산대첩이 있을 때 육상에서는 웅치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며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 덕분에 오늘날 우리 일상과 대한민국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 군수는 “그동안 웅치전적지를 사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며 “전북도에서 문화재청에 지난 7월 사적 지정을 신청해 심의 중인데 문화재청 의견에 따라 문화재구역을 보완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웅치전투 의병장인 황박 장군과 정협 장군의 후손인 황석규씨와 정완철씨도 참석했다. 두 사람은 “웅치전투의 항전이 임진왜란 초기 호남 방어에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다”며 “웅치전적지를 사적으로 추진해 민족자존의 긍지를 높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웅치전투를 조선이 육상에서 실질적으로는 승리한 최초의 전투로 평가하고 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최대 위기 상황에서 왜군의 예봉을 꺾어 전선 확대를 저지한 전투였다는 것이다. ‘약무호남 시무국가’(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라는 말의 기원 또한 이 전투라는 의미도 내놓고 있다.
박용근 기자 yk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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