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상 지킴이 2405일 "시민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민병래의 사수만보]

민병래 입력 2022. 8. 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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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볕 더위에 소녀상 앞을 지키는 반일행동 4기 대표 이수민

[글쓴이: 민병래(작가)]

박근혜 정부는 2015년 12월 28일 아베 정부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 없이 배상도 아닌 위로금으로 매듭짓고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옮긴다는 비밀 합의를 맺었다. 이 굴욕적인 합의에 반대하는 청년, 학생이 '소녀상' 앞에서 농성을 벌인지 벌써 2405일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사죄와 배상을 거부하고 오히려 평화헌법을 폐기하는 개헌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윤석열 정부 또한 2015 합의를 바로 잡기는커녕 강제징용 노동자의 배상문제를 국민의 성금을 모아 위로금으로 해결하겠다며 박근혜 정부의 길을 뒤쫓고 있다.

'소녀상' 앞 농성의 중심인 '반일행동'의 4기 대표 이수민을 7월 30일, 일본대사관 앞 토요투쟁 현장에서 만났다. 그로부터 역사를 거스르는 일본정부와 대일 굴종외교를 펴는 윤석열 정부에 맞서 어떻게 사죄와 배상을 받아낼 것인지 2015년부터 7년간 농성하며 겪었던 어려움과 그 오랜 시간을 버텨온 힘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다.
 
▲ 소녀상 앞에서 발언하는 이수민 대표 그는 2021년 말부터 반일행동 4기의 대표를 맡고 있다.
ⓒ 이수민제공
   
▲ 소녀상 앞에서 이수민 그는 반일행동 4기의 대표를 맡고 있다.
ⓒ 민병래
  
극우의 행패가 갈수록 심해졌어요

"그날, 제가 일인시위를 소녀상 옆에서 하고 있었어요. 어떤 승합차가 우리를 덮칠 듯 다가오다가 바로 앞에서 멈췄어요. 깜짝 놀랐죠. 운전한 사람은 '우파삼촌TV'를 운영하는 유튜버인데 '흐흐흐 애들 놀래기는, 왜 놀래는데? 잠시 섰다 가는데, 와 재밌다 진짜!' 하며 비웃더라고요. 경찰은 그런 행동을 한 사람에게 차를 빼라고만 했어요. 어처구니가 없었죠."

이수민은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낼까 망설이다가 2020년 7월 14일 사건부터 시작했다. 그동안 극우파는 소녀상 앞에서 많은 행패를 부렸다. 술 취해 욕을 하는 건 기본이었다. 성희롱도 흔했다. 자유연대 김상진 사무총장은 "천막으로 가리면 거기서 뭣 좀 하려고? 거기서 혹시 OO하고 막 그런 건 안 하지 설마?"라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이렇게 차를 가까이 들이대며 위협을 느끼게 한 적은 없었다. 이 사건은 7월 16일 저녁, MBC 주요 뉴스로도 나올 만큼 충격이 컸다.

이수민과 반일행동은 종로경찰서로 달려갔다. 유튜버 김기환을 '살인미수'로 고소하고 철저한 수사를 요구했다. 김기환은 '펜앤드마이크'를 통해 "귀가하던 중 카메라 위치조정을 위해 잠시 차를 세웠는데 하필이면 그 장소가 소녀상 앞이었다"라며 자기를 고소한 '반일행동'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말했다.

"종로경찰서는 김기환을 무혐의로 검찰에 송치했어요. 기가 막혔죠. 더 화가 난건 '명예훼손죄'를 수사한다고 경찰이 우리의 이름을 캐묻고 사찰하는 거였어요. 정작 피해자는 우린데 이게 말이 되나요. 일본하고 싸우기도 힘든데 극우파와 종로경찰서가 우리를 너무 힘들게 했어요."

이 사건은 검찰에서도 불기소로 종결되고 말았다. 경찰만이 아니라 검찰마저 극우를 감싸는 듯한 모습에 이수민의 마음은 멍들어갔다.

이수민은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처음 접했다. 할머니들이 자기보다 어린 나이에 강제로 끌려갔는데 만일 자신이 그런 처지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가 소녀상을 직접 만난 건 2018년 12월 어느 토요일.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친구와 함께 소녀상을 찾았다. 현장에는 지킴이들이 비닐을 덮어쓰고 추위와 맞서고 있었다. 안쓰러웠다. 자신은 마음에 담아만 두었는데 그런 실천을 보니 숭고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날 이후 이수민은 '반일행동'에 스며들었고 그때부터 1230일 넘게 이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수요시위의 장을 지키기 위해 연좌 농성을 했어요

"그동안 우리 투쟁에서 제일 기억나는 건 2020년 6월 23일 밤 0시예요. 우리는 급히 모였어요. 극우단체들이 종로경찰서 집회신고 대기실에서 밤을 새우며 소녀상 앞에서 7월 중순까지 집회를 열겠다고 신고서를 냈어요. 수요일인 24일 낮 12시부터 첫 집회를 한다는 거고요.

이들은 '위안부 앵벌이 stop' 같은 말을 하고 소녀상 철거를 외쳤던 사람이에요. 너무 놀랐죠. 이렇게 되면 30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았던 수요시위가 자칫 열리지 못할 수도 있겠더라고요. 우리는 소녀상 앞을 지키겠다고 결심했죠. 현수막을 여러 갈래로 찢고 밧줄까지 연결해 소녀상과 우리를 하나로 묶었어요. 그리고 바위처럼 눌러앉았죠. 그런데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우리를 두 겹 세 겹으로 에워쌌어요"

그동안 소녀상에 대해 많은 테러가 있었다. 2016년 6월에 "소녀상을 부수면 돈을 준다기에 망치를 휘둘렀다"는 사람이 있었고 2020년 5월 20일에는 서울 동작구에 있는 소녀상의 얼굴이 돌에 찍혀 모양이 일그러졌다.

같은 해 5월 24일 충남 서산시에서는 누군가가 소녀상에 수갑을 채우는 행동까지 저질렀다. 이런 상황에서 '반일행동'은 극우파의 집회를 넋 놓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런데 경찰은 극우 쪽이 먼저 집회신고를 했으니 '반일행동'에게 농성을 풀고 장소를 내어주라고 종용했다.

"농성 이틀째가 되는 24일 날 장대비가 내려 빗물이 인도나 차도에 찰랑거릴 정도로 고였어요. 우비를 쓰고 엉덩이에 비닐을 깔았는데 속옷까지 다 젖었죠. 새벽부터 비를 맞고 먹지도 못해 아침나절에는 오슬오슬 떨렸어요. 다행히 우리가 농성하는 옆에서 수요시위는 예정대로 열렸고 잘 끝났어요. 그런데 경찰이 어느 순간 포위망을 풀더라고요. 경찰 뒤에서 우리를 응원하던 시민이 하나둘 다가왔어요. 뉴스를 보고 걱정하는 마음에 지켜보던 사람들이죠. 우리는 손을 맞잡고 소녀상을, 수요시위의 장을 지켜낸 기쁨을 나눴어요." 
 
▲ 장대비속에서 소녀상을 지키는 이수민(앞줄 오른쪽) 그는 2021년부터 반일행동의 4기 대표를 맡고 있다.
ⓒ 이수민제공
 
▲ 소녀상 앞을 지키기 위한 농성장에서 이수민(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파란 우비) 그는 2021년부터 반일행동 4기의 대표를 맡고 있다.
ⓒ 오마이뉴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경찰은 극우단체들이 '반일행동'을 '집회방해와 코로나 방역법 위반'으로 고발하자 소환장을 발부했다. 종로서는 반일행동 회원 이경송과 김은혜, 몇몇 시민을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현재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살인미수'와 '성희롱'으로 극우파를 고발한 것은 무혐의 처분하고 자신들만 기소의견으로 처리하니 이수민은 경찰의 수사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가 경찰에게 분노하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극우파가 2020년 6월 20일, 소녀상 뒤에 욱일기가 그려진 현수막을 걸었을 때 '반일행동'은 이를 떼어내려 했다. 이때 경찰은 "집회 물품이고 표현의 자유"라며 반일행동의 회원을 제압하고 연행했다.

이수민과 반일행동의 청년들은 이렇게 탄압받고 마음에 병이 들면서도 2015년 12월 30일부터 7년 동안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외쳐왔다. 이수민 또한 4년 가까이 현장을 지켰고 2021년 말부터는 대표까지 맡았으니, 그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연대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연대의 힘, 시민의 힘이에요. 6월 24일 날 수요시위가 끝나고도 우리는 자리를 계속 지켰어요. 다음 날도 극우파가 집회를 할 예정이니 떠날 수가 없었죠. 경찰도 계속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뒤에선 시민들이 경찰을 지켜봤죠. 결국 경찰은 연대의 힘이 두려워 포위망을 풀었어요. 그날이 지난 7년여 농성 기간 중 가장 감격스러운 날이었어요."

그의 말대로 소녀상 앞은 뜨거운 연대의 장이었다. 앞에서 대치하던 의경과 경찰이 슬쩍 음료수를 놓고 가기도 하고 신촌에서 일한다는 어떤 배달기사는 망원동에서 고로케를 사서 3년 동안 주 5회씩 격려 방문을 거르지 않았다.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 농성장에선 고로케 아저씨라 부른다.

또 소녀상 앞에서 매주 1000배를 하는 시민, 사탕 한 알, 김밥 한 줄을 챙겨주는 주변 건물의 경비아저씨, 천막을 같이 설치하고 검찰청 앞 기자회견에 동행했던 아저씨, 언니·오빠 존경해요라는 댓글을 달아준 중학생 등의 뜨거운 연대가 있었다. 소녀상 앞은 든든한 성채였다. 해외에서도 발길이 이어졌으니 프랑스 리옹에서 왔던 엉투완베잉은 "농성장에서 노숙한 것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고 영광이었다"라는 말까지 남겼다.

소녀상 앞 연대는 국내에 머무르지 않았다. 일본이 2015 합의에서 요구했던 게 당시 전 세계에 설치된 아홉 개의 기림비를 철거하는 것이었다. LA주재 일본 총영사 아키라무토는 "내 임무는 (LA 인근) 글렌데일시의 소녀상을 철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고 2022년 7월 독일의 카셀 대학 총학생회에서 자체적으로 소녀상을 설치했을 때도 프랑크푸르트 주재 일본공사가 카셀 대학 총장을 직접 찾아가 항의했을 정도다.

이처럼 일본은 범정부 차원에서 소녀상의 철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알리는 상징이며 연대의 구심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독일 베를린의 소녀상 앞에서 "위안부는 사기다"라고 주옥순 일행이 외쳤을 때 코리아협의회나 베를린 거주 일본인, 나치의 전쟁범죄에 반대하는 할머니, 독일 내 극우를 반대하는 단체가 손을 잡고 소녀상 보호에 한목소리를 냈다. 일본과 한국 극우의 철거주장이 오히려 연대의 불씨를 지핀 것이다.
 
▲ 미국 버지니아주 에난데일 소녀상 앞에서 이수민 그는 2021년 말부터 반일행동 4기의 대표를 맡고 있다.
ⓒ 이수민 제공
 
우리는 소녀상 지킴이에서 반일행동으로 변화해왔어요

"우리는 공부를 많이 하려고 해요. 뉴스를 보고 토론을 자주 해요. 이번에 아베가 죽었을 때 윤석열이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고 아베 전 총리님의 명복을 기원합니다'라고 조사를 썼더군요. 마치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때 대동아공영권을 얘기하는 듯했어요.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이라니? 아베가 꿈꾼 건, 일본의 재무장, 전쟁 가능한 국가, 한반도로 출병하는 것 아닌가요. 이해할 수 없었어요. 아베는 2015 합의 시에도 '위안부는 존재하지 않았다'라며 역사를 거듭 부정했잖아요. 일본 내에서도 재일동포를 혐오하는 분위기를 만들었구요.

그래서 저희는 이름을 세 번 바꿨어요. '소녀상 농성 대학생 반일행동'에서 '반아베반일청년학생공동행동'으로 다시 '반일행동'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요구만이 아니라, 일본의 재무장화, 군국주의화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전선을 넓혀온 거죠. 우리의 싸움은 역사를 기억하는 데 머물지 않아요.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으려는 싸움입니다. 승리는 아득히 멀어도 그 뜻을 굽힌 적은 없어요."

이수민의 말을 빌지 않아도 한반도 진출에 대한 일본의 야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50년 당시 일본총리 요시다 시게루는 한국전쟁은 하늘이 일본에 준 축복이라고 했다. 미군정에서 독립하고 재무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병참기지 노릇을 하며 경제는 부흥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국전쟁은 일본군이 한반도에 다시 진출하는 계기도 되었다. 1950년 10월 미군이 원산항에 상륙할 때 원산 앞바다에 깔린 기뢰를 일본 해상보안청의 소해(掃海)부대가 출동해 제거했다. 미군의 요청을 받은 이 작전은 꽁꽁 감춰졌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30년 후 해상보안청장의 수기를 통해 알려졌다. 이뿐 아니라 한국전쟁에서 일본군이 미군의 길안내를 하고 전투에도 참여했다는 증언이 많이 쌓여있다.

그때는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던 출병이었지만 이제는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전쟁 가능한 국가로 거듭나 재진출을 이루려 한다. 한미일 군사동맹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지금은 놓을 수 없어요

"지난 5월에 아빠와 엄마가 소녀상 앞으로 찾아오셨어요. 저는 부모님과 얘기를 많이 나누는 편이에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세월호참사가 일어났어요. 저보다 두 살 위지만 같은 세대인 언니 오빠가 그렇게 죽는 걸 보고 놀랐죠. 그때 세월호의 아픔에 동참하려고 부모님과 얘기를 많이 했어요. 저도 우리 사회에 많은 의문을 갖게 되었고 그 해답을 찾으려 현장으로 거리로 많이 나갔죠.

엄마, 아빠는 저의 활동에 대해 반대하지는 않으세요. 다만 걱정하세요. 더우나 추우나 거리에 있으니까, 사실 속마음은 알아요. 빨리 졸업하고 좋은 곳에 취직하기를 바라시죠. 그런데 지금은 놓을 수가 없어요. 제가 젊은 날 한때 소녀상 지킴이를 했었다는 보람에 만족할지 반전평화운동가로 살아갈지 미래는 알 수 없어요. 분명한 것은 4기 대표를 맡고 있는 지금 소녀상 곁을 떠날 수 없다는 거죠."

토요투쟁이 끝난 저녁 6시, 조금 누그러졌지만 불볕 더위는 여전히 맹렬했다. 스스로도 지쳤는지 엿가락 같은 모양새가 된 햇살이 이수민과 반일행동 회원들을 끈적하게 감쌌다. 수십 층 높이인 주변의 트윈트리, 테라로사, SK 빌딩 때문인지 소녀상은 거센 물결에 떠 있는 한낱 나뭇잎처럼 보였다. 이수민과 많은 얘기를 나누고 현장을 떠나는데 그의 말이 귓가에는 맴돈다.

"힘들 땐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다시 들어봐요. '사죄를 받아야지, 분명히. 일본에서 일으킨 전쟁이야. 그런데 사죄 없이 돼'라는 김학순 할머니의 말. '죽을 때까지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일본 사람들하고 싸울테니까'라는 강덕경 할머니의 말은 울림이 있어요. 그게 저희를 일으켜 세워요. 그래서 지금은 놓을 수 없어요."

[못다한 이야기]

① '반일행동'은 시민성금을 받지 않는다. 후원을 하고자 할 때는 '반일행동'이 발행한 책 <비가 오나 눈이 오나 2000일>(코리아 미디어)을 구매하면 인세가 '반일행동'에 들어가게 되니, 이런 방식을 택하면 된다.
② 제목에서 소녀상 지킴이 2405일이라고 쓴 것은 이수민을 인터뷰한 7월 30일 기준이다.
③ 현재 평화의 소녀상은 전 세계 열아홉 곳에 설치되어 있고 가장 최근에 설치된 것이 2022년 독일 중부 카셀주립대학의 본관 앞이다. 정의연은 앞으로 유럽의 주요 도시 그리고 남미에도 더 많은 소녀상이 세워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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