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만으로 '좋은 섹스'일까?'..'미투' 이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묻다

이영경 기자 2022. 8. 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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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
캐서린 앤젤 지음·조고은 옮김|중앙북스|224쪽|1만6000원
2017년 12월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자들이 할리우드에서 ‘#MeToo’ 운동 지지하는 행진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2017년 전 세계적 ‘#MeToo’ 운동을 촉발시킨 할리우드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 와인스타인은 징역 23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며, 11건의 성폭력으로 추가 재판을 받고 있어 최대 140년이 선고될 수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미투 운동 이후 ‘좋은 섹스’의 요건이 된 ‘동의’
동의하기 위해선 ‘자신의 욕망을 알고 주장해야’ 요구
‘당당한 여성;은 강압·폭력 속 ’동의‘나 모호함 부정
여성은 왜 항상 자신의 욕망을 알고 주장해야 하나
’좋은 섹스‘를 위한 부담을 여성에게 지우나

한국 사회 ‘미투(#MeToo)’ 운동의 상징이 된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 4일 3년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만기출소했다. 피해자 김지은씨는 생방송 뉴스에서 안 전 지사의 성폭행을 폭로하면서 ‘미투’ 운동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인사권을 가진 절대적 권력자인 도지사와 수행비서, 수직적인 권력관계 속에서 벌어진 성폭력에도 ‘동의’는 피해자의 발목을 잡았다. 안 전 지사 측은 김씨가 “학벌 좋은” “주체적이고 결단력 있는 여성”으로서 “성적 자기결정권이 제한되는 상황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많은 비판을 받고 결과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같이 ‘위력’이 명백한 관계에서도 피해자의 자기결정, 즉 ‘동의’ 여부가 논란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안 전 지사는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미투’ 시대를 통과하면서 한국 사회 여성들의 섹슈얼리티가 얼마나 위험에 처해 있는지 드러났다. 불법카메라 촬영, n번방 사건 등 이슈를 거치며 젊은 여성들은 성폭력의 위험을 차단하고자 ‘비혼·비출산·비연애·비섹스’를 내세우는 ‘4B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사적인 관계, 가족, 직장, 사법체계 안에서 불평등한 남녀의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이상, 안전한 (이성애)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친밀한 관계를 원하며 형성해가고 있다. 성폭력의 위험이 상존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일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성애자) 여성들의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캐서린 앤젤의 <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치열한 탐구의 결과다. 저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정신의학 및 섹슈얼리티 역사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페미니즘·섹슈얼리티·젠더 및 정신분석에 대한 글을 쓰는 작가다. 저자는 2017년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에 대한 폭로로부터 촉발된 미투 운동 이후로 여성의 섹슈얼리티, 나아가 모두의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재구성되어야 하는지 질문한다.

미투 이후, 서구 사회에서 ‘좋은 섹스’를 하기 위한 요건으로 ‘동의(consent)’ 개념이 강조된다. 여성이 섹스로 나아가는 과정 하나하나에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고 ‘동의’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는 ‘자기 지식(self-knowledge)’이 필수적이다.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알아야 하며, 적극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요구된다.

셰릴 샌드버그 전 메타 최고운영책임자가 2013년 7월 <린 인(Lean In)> 출간을 기념해 내한해 기자간담회에서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는 대도시를 배경으로 여성들의 솔직한 사랑과 성을 다뤘다. 이는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잘 알고 표현해야 한다는 ‘자신감 페미니즘’과 맞닿아 있다.
‘동의’ 하에 가진 ‘나쁜 섹스’는 그저 ‘경험’일까?
미 대학 여성 신입생 6명 중 1명은 간강 및 강간미수 경험
‘나쁜 섹스’는 불평등의 문제

저자는 이를 ‘자신감 문화’와 연결시킨다. 자신감 문화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이는 메타의 최고운영책임자였던 셰릴 샌드버그다. 샌드버그는 2013년 펴낸 책 <린 인>에서 여성의 자신감, 자기주장을 강조한다. 자신감 문화가 강조되는 순간 여성을 억압하는 것은 가부장제나 뿌리 깊은 성차별이 아니라 여성 개개인의 자신감 부족이 된다. 긍정적 사고에 대한 강조는 자신감 결여나 확신이 없는 상태를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취약성을 억누르는 결과를 가져온다.

‘적극적 동의’는 1990년대 미국 강간법(rape law)의 변화와 함께 등장했다. 과거 강간 예방 캠페인이 섹스에 대한 거절 의사를 존중하는 데(No means No) 초점을 맞췄다면, 적극적 동의는 합의와 ‘좋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993년 미국 안티오크 대학은 성범죄 예방정책을 벌이면서 “동의란 말로 묻고 말로 답하는 것을 뜻하며 그렇지 않으면 모든 수준의 성적 행동에 대해 동의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2011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공적 자금을 받는 대학들에 학교 내 성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인 ‘타이틀9’을 준수할 의무를 강조했다.

이에 대해 ‘자신감 페미니스트’들은 일제히 비판을 가했다. 여성의 힘이 아닌 취약성을 강조하며 여성을 욕망이 없는 존재로, 피해자 위치에 가둔다는 취지였다. 살다보면 ‘나쁜 섹스’를 할 수도 있다는 것, 여성들은 이를 극복할 수 있고 상처를 털어버리고 강인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쁜 섹스’는 그저 미성숙한 시기에 겪은 시행착오에 불과할까? 여성은 성적 어려움, 고통, 불안으로 인해 남성에 비해 더 고통받는다.

미국 여성 5명 중 1명은 강간이나 강간 미수를 경험한다. 친밀한 관계의 파트너 중 3분의 1이 여성에게 신체적 폭력을 가한다. 대학에 갓 들어간 여성 신입생은 더 심하다. 미국 대학의 1학년 여성은 1학년을 마칠 때까지 6명 중 1명이 강간 혹은 강간 미수를 당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나쁜 섹스’ 그 자체가 성폭력과 깊이 연루돼 있다.

저자는 “나쁜 섹스는 여성은 성적 활동에서 동등한 행위자가 될 수 없으며 남성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을 만족시킬 권리가 있다는 젠더 규범에서 나온다”면서 “이는 정치적 문제이며, 쾌락과 자기결정권 영역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또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들이 겪는 불쾌한 섹스와 강압 및 폭력 문제를 그저 ‘나쁜 섹스’로 치부해버릴 수 있다.

앞서 ‘자신감 페미니즘’이 말했듯, 동의 문화는 자신이 원하는 걸 명확히 알고 표현할 줄 아는 당당한 여성을 강조하면서 취약성을 부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성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항상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폭력, 여성혐오, 수치심 때문에 욕망을 발견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저자는 ‘동의’의 개념에서 한발 나아가 욕망의 모호함,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섹스의 윤리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여성의 욕망’에 대해 성과학이 어떻게 연구하고 정의내려왔는지를 살펴본다. 영향력 있던 성과학자였던 윌리엄 마스터스와 버지니아 존스는 1950~1960년대 워싱턴 대학의 실험실에서 여성 및 남성 지원자에게 전극을 붙이고 성행위 중인 피험자의 심박수와 체온 등 생리적 과정을 관찰했다. 그들은 여성의 쾌락에서 클리토리스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밝혀냈다. 클리토리스와 오르가슴에 대한 통계를 산출하는 등 여성들의 성적 쾌락을 주요하게 다룬 이들의 연구를 페미니스트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하지만 성과학이 찾아낸 ‘여성의 강렬한 성욕’은 여성의 의사를 무시하고 남성과 섹스를 해야만 하는 의무의 근거로 쓰이는 역효과도 가져왔다. 이에 남성의 욕망은 본능적이지만 여성의 욕망은 반응적이고 관계적이란 반론이 나온다. 하지만 적절한 맥락 속에서 여성이 흥분하고 욕망이 생긴다면, 설령 여성이 원하지 않을 때조차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으로 만들 위험이 도사린다.

성의학의 발견은 흥미롭고 통념을 깬다. 그런데 살펴볼수록 욕망과 흥분에 대한 연구는 성별 편향적이고 인종차별적이기도 한 것으로 드러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여성의 의사를 떠나 교묘하게 왜곡된다.

정신의학 및 섹슈얼리티 역사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페미니즘·섹슈얼리티·젠더 및 정신분석에 대한 글을 쓰는 작가 캐서린 앤젤ⓒStacey Yates
욕망은 정확하지 않으며 가변적이고 불확실
타인과 나누는 협상과 타협 속에 변화하는 것
모두가 즐겁고 민주적 쾌락을 위한 노력
‘내일의 좋은 섹스’는 계속해서 탐구하고 만들어가야

저자는 질문한다. 왜 여성의 욕망을 꼭 알아야 하는가? “섹스를 다시 좋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부담은 왜 꼭 여성,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떠안아야 하는가?”

저자는 다시 ‘동의’가 간과해버린 ‘취약성’으로 돌아간다. 저자는 욕망의 다양성과 불확실성, 가변성을 강조한다. 욕망은 생겨났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정확히 원하는 게 뭔지 모를 때가 많다. 그것은 우리를 취약함의 세계로 이끈다. 욕망할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데, 남성은 취약성에 대한 공포와 부인 때문에 섹스를 ‘여성에 대한 승리’로 재구성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섹스와 쾌락으로부터 남성을 소외시킨다. 타인과 함께하는 섹스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으며 미지의 영역이다. 섹스는 누군가의 욕망에 부응하고, 욕망 안에서 서로를 믿고 두려움을 협상하며 이루어지는 하나의 실천이다.

책은 사회적 이슈와 대중문화를 언급하며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집요하게 탐구한다. 그 끝에 내린 결론은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에 가깝다.

‘적극적 동의’ 개념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여성이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수용되기 어려운 한국에서는 갈 길이 먼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동의’가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닌 최소한의 기준임을, 동의의 한계를 넘어 더 많은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음을 이 책은 열어보인다. ‘더 좋아진 내일의 섹스’는 현재에서 계속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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