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親日·反日 논란에 주저앉은 최승희의 미국 투어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2. 8. 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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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938년 2월 LA 공연장엔 배일 시위, 뉴욕에선 경찰이 신변보호
1930년대 최승희는 최고 인기를 누린 스타였다. 최승희는 1938년~1940년 미국과 유럽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세계적 무용가로 떠올랐다.

조선 춤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린 최승희의 월드 투어는 초반부터 시련을 겪었다. 1938년 초 첫 목적지인 미국에서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기 때문이다.

1937년 12월19일 요코하마를 출발한 최승희는 1938년 1월 샌프란시스코 도착, 1월22일 샌프란시스코 카란(Curran Theater) 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최승희가 오빠 최승일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폭발적 인기속에 대갈채를 받아 조선 정취를 섞은 꽃다운 예술로 저네들을 완전히 도취시키고 말았다고 한다. 이같이 상항(桑港·샌프란시스코)의 첫 공연에 대 성공을 본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직컴퍼니에서는 즉시로 전 미국을 통하야 6개월동안 공연을 하기로 계약을 체결하였다고 한다.’( ‘최승희 여사 첫공연 상항서 폭발적 대환영’, 조선일보 1938년2월6일)

◇뉴욕 공연장 앞에서 ‘최승희 배격’ 삐라

메트로폴리탄 뮤직컴퍼니는 미국의 대표적 공연기획사였다. 최승희는 2월2일 로스앤젤레스 이벨극장 공연에 이어 2월20일 뉴욕 길드극장 무대에 섰다. 공연 리뷰는 대부분 호의적이었지만, 친일 논란에 휩싸였다. 최승희가 일본 문화를 선전하러 왔다고 오해한 일부 교포들과 중국인의 반감을 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뉴욕 공연 때는 경찰관이 신변보호까지 할 정도였다.

‘뉴욕 공연시에는 그들로 하여금 ‘최승희 배격’의 삐라를 입구와 길바닥에 뿌린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최승희가 일본 문화 선전하러 왔다는 이유에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가지 사정이 위험하게 됨으로 뉴욕 영사관에서는 여러 가지로 염려하여 특히 아메리카 경찰에 나의 보호를 청하여 주시어서 공연할 때 경관이 화장실을 경계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최승희는 월간지 ‘삼천리’(제10권10호, 1938년10월호)에 이렇게 밝혔다.

최승희는 사진가들이 즐겨 찍는 대상이었다. 1930년대 힘차게 도약하는 최승희의 모습은 날렵하고 세련된 근대를 상징하는 듯하다.

◇파리 공연 때 日대사관서 티켓 400장 구입

해외공연에 나선 최승희는 ‘사이 쇼키’(Sai Shoki)라는 이름을 썼다. 최승희의 일본식 발음이었다. 미국은 물론 유럽 공연 팸플릿이나 관련 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26년 도쿄의 이시이 바쿠(石井 漠·1887~1962) 무용연구소에 들어가 무용에 입문하면서부터 썼던 이름이었다. 일본 무용계에 데뷔한 최승희로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있다. 하지만 미국에 건너온 교포들 입장에선 조선인이 일본 이름으로 소개되는 걸 곱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최승희의 해외 공연이 일본 정부와 일본인 교민들의 지원 아래 이뤄졌다는 사실도 빠뜨릴 수없다. 최승희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뉴욕 영사관은 당연히 일본 외무성 산하였다. 1939년 2월6일 최승희의 브뤼셀 공연을 본 후 조선일보에 기고했던 고고학자 김재원(1909~1990)은 회고록에서 흥미로운 증언을 남겼다. ‘그녀의 해외 공연은 일본 외무성이 특별한 호의를 가지고 지원해 주었다. 예를 들어 파리 공연 때는 일본 대사관에서 400개의 좌석을 사서 친일적인 프랑스 사람에게 주었으며 마르세이유 공연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내가 안막(최승희 남편)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박물관과 한평생’ 67쪽)

1937년2월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최승희 고별공연 겸 신작발표회. 조선일보 후원으로 열렸다.

◇일본 대사관, 영사관이 리셉션 열어줘

김재원은 최승희의 첫번째 미국 공연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도 적었다. ‘소문에 의하면 최승희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크게 망신을 당했다 한다. 공연 도중 우리 교포가 윗층에서 꽹가리를 두들겨대는 통에 공연장은 수라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일본을 떠날 때 ‘사이쇼기’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갔고, 미국에서도 완전히 일본 앞잡이로 행동하여 그것이 우리 교포들의 비위에 거슬렸던 것이다. '

최승희 스스로도 일본 정부가 해외 공연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삼천리’(1941년4월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 각국을 순연(巡演)하면서 각 처의 일본대사관 혹은 일본공사관에서 대단한 호의로 ‘레세푸숀’(리셉션)을 해서 즉 소개 겸 환영회를 개최해주었는데 그때마다 그곳 유명인사와 관계의 고관, 또는 예술가들이 청하여서 소개해주므로 환담할 기회를 얻을 수있었습니다. 대개 각 대신을 비롯하여 ‘엔 몰간’이라든가 ‘헤렌 파카사티’라든가 ‘마루피나 호포리나’ 등 제씨(諸氏)들과 상면했었습니다.’

일본 대사관·영사관에서 최승희 공연을 선전하고 지원하기 위해 현지 유력층을 초대하는 리셉션을 개최하는 등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다는 얘기다. 일본 입장에선 자국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유명 무용가를 내세워 식민 통치의 정당성을 과시하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최승희는 유럽에선 조선인 무용가라는 사실을 내세웠지만, ‘사이 쇼키’란 이름을 썼기 때문에 일본인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도 있다. 아시아·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유럽 관객입장에선 조선 출신 일본 무용가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을 것이다.

최승희는 1939년 유럽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미국으로 건너와 다시 도전했다. 이번엔 대성공이었다. 최승희의 미국 공연 소식을 전한 조선일보 1940년 4월2일자 기사

◇排日운동 한다는 소문에 시달려

김재원이 밝힌 것처럼, 1938년 2월 LA 공연 때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재미 교포들이 시위까지 벌였던 것같다. 최승희는 1938년 8월 ‘삼천리’에 보낸 글에서 ‘로스앤젤레스에서 공연할 때 극장 입구 부근에서 조선 동포 몇 사람이 배일 마크를 팔았다고 하는데. 그것을 내가 시켰느니, 또는 알고도 묵인했다느니 하는 오해’라고 썼다.

뉴욕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들은 나더러 라디오 방송으로 배일연설을 하라고 전화로 협박을 하기도 하고 공연회가 있을 때마다 회장앞에서 일화(日貨)배척의 ‘마크’를 파는 등…드디어 ‘메트로폴리탄’에서는 정치적 이유에 의하야 부득이 귀하와의 계약을 파기한다는 통지가 왔다.’(‘무용15년’, 조광 제6권1호, 1940.1)

그런데 최승희는 미국에서 반일적인 행동을 했다는 소문에도 시달렸던 모양이다. 최승희는 ‘삼천리’(1938년10월호)에 이런 소문을 해명하는 글을 썼다. ‘동경 있는 내 연구소로부터 온 편지에 의하면 내가 아메리카에서 배일운동을 한다는 소문이 떠들고 또 여러 잡지에도 꼬싶이 났다는 것을 듣고 사실무근인 그런 소문에 놀라고 있습니다. 가령 그 소문이 허튼 거짓말이라 치드래도 그 소문의 성질이 나에게는 중대한 것이고 또 소문만이라도 그렇게 났다면 나를 길러준 동경 여러분께 미안하여 그냥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여기 대사관과 로산젤쓰의 영사관으로부터 사실무근인 것을 외무성에 보고하였습니다.’

◇광복 전 일본군 위문공연에 동원

최승희는 친일(親日)과 반일(反日)의 첨예한 틈바구니에 끼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였다. 조선 춤을 세계에 알린 공로를 인정받기는커녕 친일, 또는 반일 인사로 몰릴까봐 전전긍긍했다. 일본 외무성과 재미 일본인 사회의 지원을 받은 데다 어린 딸과 연구소를 도쿄에 두고 온 최승희는 반일 캠페인에 동조할 처지도 아니었을 것이다. 배일(排日) 정서에 놀란 메트로폴리탄 뮤직 컴퍼니는 계약을 파기했고, 최승희는 또 다른 미국의 유수 기획사인 NRC 아티스트 서비스와 추계 공연을 계약했으나 이마저 제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최승희는 일류호텔에서 삼류호텔로, 다시 흑인들이 사는 아파트로 옮겨다녔고, 미술가들의 모델 노릇으로 돈을 벌어야할 만큼 궁지에 몰렸다. 유럽 투어 성공은 사면초가에 몰린 최승희의 역전타였다. 이 성공에 힘입어 두번째 미국 공연은 별다른 시비 없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아메리카의 봄 무대에, 현란 춤추는 朝鮮’(1940년1월27일) ‘白衣의 발레리나, 양키팬을 풍미’(1940년4월2일, 이상 조선일보). 미국 공연의 성공을 알린 기사들이 이어졌다. 최승희는 중남미 공연까지 마친 뒤 1940년 12월 도쿄로 돌아왔다.

해외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최승희를 맞은 건 전쟁이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치달은 일본이 해외에서 인정받고 돌아온 최승희를 그냥 둘 리 없었다. 최승희는 일본군 위문 공연에 불려다녔고, 광복후 예술계 친일인사로 몰렸다. 1946년7월 월북한 최승희는 한때 북한을 대표하는 무용가로 대접받았으나 1967년 숙청당해 1969년 8월8일 사망했다. ‘중국으로 도망가려다 피살됐다’ ‘국제 스파이로 몰려 처형됐다’ ‘수용소에서 자살했다’…최승희의 죽음에 대해 이런 저런 증언이 쏟아졌으나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다. 비참한 종말이었다.

◇참고자료

최승희, ‘미국통신’, 삼천리 제10권10호, 1938.10.

최승희, ‘무용15년’, 조광 제6권1호.1940.1

박노경, ‘춤의 구미순례 마치고 도라온 최승희의 회견기’, 조광 제7권1호, 1941. 1

‘최승희, 귀향감상록’, 삼천리 제13권제4호, 1941.4

김재원,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2013

윤혜미, ‘최승희 무용활동에 관한 역사적 연구’, 중앙대 박사학위논문, 2009.8

정병호, 춤추는 최승희-세계를 휘어잡은 조선 여자, 뿌리깊은 나무,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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