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묵언] 당신의 지식은 건강하신가

김택근 시인·작가 2022. 8. 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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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 용산에 모여 있다. 나라가 온통 어수선하다. 아침에 내놓은 정책이 해가 저물기 전에 저자에서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같은 사안을 두고 사람마다 말이 다르고, 말을 주워 담는 사람마저도 다르다. 해괴한 소문들이 자체의 기이한 생명력으로 떠돌아다닌다.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하게 지나고 있다.

김택근 시인·작가

그러자 100일이 안 된 윤석열 정권을 향해 저주와 조롱이 쏟아지고 있다. “하루속히 정리돼야 할 정권” “준비가 시급하다”는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퇴진운동을 선동하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

어느 한쪽은 윤석열 정권이 실패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머잖아 다른 한쪽도 움직일 것이다. 다시 거리엔 살기가 자욱할 것이고 곳곳에서 서로를 저주하는 굿판이 벌어질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완충지대가 사라졌다. 정치판에도 중간지대가 보이지 않는다. 그라운드에서는 반칙이 난무하고 있는데 심판의 휘슬은 울리지 않는다. 열성 지지자들만 바라보며 무조건 상대를 불신하고 경멸하며 몰아붙인다.

정치인의 말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말은 흉기일 뿐이다. 정치인이 자신의 말에 정치생명을 걸었던 적도 있었건만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었다. 시대의 아픔을 따뜻하게 녹이는 김기석 목사도 요즘 시국이 많이 아픈 모양이다. 지난주 이 난에서 사람은 말로써 세상을 짓는데 정치인은 거짓말로 분열과 혼돈만을 불러오고 있다고 탄식했다. “작은 불이 큰 숲을 태우듯이 우리는 말로 세상을 위태롭게 만들곤 한다”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말, 진실과 자유에 복무하는 말, 품격 있는 말, 숙의의 과정을 거친 참된 말이 그립다고 했다.

서생들은 뜻이 있어도 말하기 겁나는 시절이다. 진영 논리에 어긋나는 의견을 개진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가운데 서 있으면 양쪽에서 공격을 받는다. 이를 피하려면 이념도 진영논리에 맞게 재가공해야 한다. 지식도 눈치껏 포장해야 한다. 의견을 진영논리에 대입하다 보니 민주, 자유, 평등, 공정 같은 용어들이 흐려지고 왜소해졌다.

그 속의 인간에 대한 존중과 연민도 엷어졌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개념들을 메마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대학에서 인문학이 천대를 받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민심이 갈라진 땅에서, 황량한 지식을 들고, 지식인들이 애처롭게 서 있다.

찰스 디킨스는 소설 <어려운 시절>에서 풍요를 내세워 획일적인 이념을 강요하는 사회를 해부했다. 통계와 수치로 모든 것을 재단하며 보이는 현상만을 좇던 1850년대 영국의 공업도시를 통해 공리주의의 허상을 풍자했다. 디킨스가 그린 그 도시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처럼 느껴진다. 여론을 수치로 계량하고, 통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민심을 갈라 치는 정치권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 표를 얻기 위해 갈등을 조장하고, 다수의 행복을 내세워 약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수치와 통계를 동원한 차가운 지식이 체험이 녹아 있는 진실을 밀어내고 있다. 소설 중의 한 대목을 추려서 옮겨본다.

<자유로운 영혼의 곡마단 소녀가 입양이 되어 학교에 갔다. 소녀는 어려서부터 말들과 함께 자랐기 때문에 말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말을 정의해보라는 질문을 받고 혀가 얼어붙었다. 소녀에게는 말이 늘 마주보고 함께 뒹굴던 그냥 말이었다. 그러자 다른 학생이 곡마단 소녀를 간단히 제압해 버린다.

“네 발을 지니고 있고요, 초식성입니다. 이빨이 마흔 개인데 어금니가 스물네 개, 송곳니가 네 개, 그리고 앞니가 열두 개입니다. 봄이 되면 털갈이를 해요. 말발굽은 딱딱하지만 쇠로 편자를 해 달아야 해요. 말의 나이는 이빨의 상태로 알아봅니다.”

교사가 곡마단 소녀에게 말했다. “자 20번 여학생, 이제 말이 뭔지 알겠지?”>

우리는 사실에만 집착하면서 진실은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지혜를 밀쳐두고 지식에만 길을 묻고 있지 않은가.

진영논리가 지적인 얼굴로 다가와 온갖 표정을 짓고 있다. 옷소매에 먹물자국이 있는 자들은 우울하다. 요즘 왜 이리 허전한지 모르겠다. 아무도 곁에 없지만 민심이 갈라진 사회에서는 사안마다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견디기 힘든,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다. 당신의 지식은 손을 타지 않고 건강하신가.

김택근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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