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느림의 미학
걷기를 통해 가늠하게 된 소요 시간으로 느긋하게 걷다 보면, 그늘 아래 왁자지껄한 어르신들의 장기 훈수 소리며 강변 카페거리의 버스킹 광경, 심지어 바람결에 나부끼는 야생화의 작은 흔들림조차 신선한 향기로 다가온다. 거리에 관계없이 여유로운 마음으로 출발하면 건강 증진은 물론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소소한 일상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는 걷기를 통한 행복이자 긍정 효과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느림의 미학에 빠져든 건 다섯 해 전, 세월의 무게감을 느낄 무렵 TV 건강 프로그램에서 100세가 넘은 나이에도 자신만의 신념으로 기운이 펄펄 넘치던 어느 일본인 장수연구가의 주장에 공감하고부터다. 또한, 요즘 핫이슈로 등장한 '소확행'과도 맥을 함께한다.
'소확행(小確幸)'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함축어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사용된 용어다. '소확행'에 업무와 일상의 조화로운 삶을 뜻하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과 공부와 일상생활의 균형을 상징하는 '스라밸(Study and Life Balance)'이란 말이 청소년들 사이에 회자된 배경 역시 과중된 학업의 무게감을 덜고 '일상 속의 작은 행복 찾기'를 추구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게 맞는 취미로 건강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기,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날리기, 공부에만 집중하기보다 자기계발을 위한 삶의 쉼표 찾기, 소확행 보물찾기 등…. 지나친 욕심보다 삶과 취미를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소득 수준에 만족하고 자신의 바람대로 소소한 행복 누리기를 위한 신조어가 날로 재생산되는 세상이다.
'가만히 10분 멍TV', 볼거리를 찾아 TV 채널을 돌리다 정지 화면에 시선이 머문, 모(某) 방송의 심야시간대 프로그램 타이틀이다. 아무런 설명도, 장면 전환도 없이 같은 모습만 계속되기에 "혹시 방송 사고 아닌가?" 하고 착각했다. 상단 타이틀을 확인하고 공감하게 되었는데,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휴식을 위한 새로운 시도이자 느림의 미학을 통해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방송사의 의도로 보인다. '빨리빨리' 하는 생각으로 서두르면 앞만 보이지만 느긋하고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바라보면 그만큼 시야는 넓고 뚜렷해진다. 그동안 잊고 있던 숱한 인연들을 새삼 떠올리며 감사를 드리는 것도 걷기와 더불어 느림의 미학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지인들과 함께할 때마다 교통수단을 'BMW(Bus·Metro·Walk)'로 바꾸라고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종상 동서대 방송영상학과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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