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래잡기]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2022. 8. 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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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묘법 거장 쇠라의 작품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센강변 한여름 휴일 풍경
유난히 등 굽은 한 청년
갑자기 찾아온 한가함에
한숨부터 돌리고 봤을 것
우리 모습과 다를게 없네
성하(盛夏). 유난히 힘들게 느껴지는 무더위의 연속이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여주인공이 내뱉은 "지금 기분 잘 기억해뒀다가 겨울에, 추울 때 다시 써먹자. 잘 충전해뒀다가, 겨울에"란 대사를 계속 되새기고 있다. 전국 휴가지마다 피서객이 몰려 코로나 바이러스의 재확산이 우려된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지만, 일상에서의 탈피를 갈구하는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아이들 등쌀에 밀려 물 반 사람 반인 곳에서 바가지를 쓸 줄 알면서도 어디론가 떠난다.

농번기와 농한기로만 나뉘던 한 해 일정에 휴가가 떡 하니 자리 잡은 것은 근대화와 산업화의 산물이다. 국가가 통합 관리하는 교육 시스템으로 아이들은 학사일정을 따르게 되었고, 공장이나 회사에서 단체로 일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다소 획일적인 휴일과 휴가 시즌이 생겨났다.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가 1884년에 발표한 작품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는 바로 그런, 한여름 휴일의 한가한 피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광학이론을 반영한 점묘법(點描法)을 고안한 것으로 유명한 쇠라는 보수적 교육방식으로 유명한 아카데미에서 정통 미술교육을 받은 인재였다. 사실 쇠라는 수많은 스케치와 드로잉을 통해 치밀하게 준비를 하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인물들의 눈코입이 거의 보이지 않는 완성작을 보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사람 하나하나를 열심히 연구하고 여러 단계 구상을 통해 겨우 탄생한 결과물이 '아니에르'다.

그림에는 옷을 벗어젖히고 센강변에서 휴식을 취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언뜻 보면 물놀이하기 딱 좋은 곳으로 보이지만, 아니에르는 파리 북서부에 위치한 위성도시일 뿐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오히려 그림에도 나타나듯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증기기관차가 지나가는 게 당연해진, 19세기 산업화의 영향으로 동네 풍경이 나날이 바뀌어 가던 개발구역이었다. 특히 작품의 배경인 강기슭은 마부들이 말을 씻기러 오던 곳으로, 쇠라가 작품 구상 초기에 남긴 스케치 중에는 실제 모습과 가깝게 말이 등장하는 오일 스케치도 현존한다.

말이 물 가까이 가기 쉬운 곳이니 사람도 물놀이를 즐기기에 적당한 수위인 곳임에는 틀림없지만, 딱히 풍광이 뛰어난 곳은 아니다. 오히려 마부의 입장에서는 노동의 현장일 뿐이다. 그뿐인가, 강 저 멀리에는 뱃놀이를 즐기는 한 커플을 위해 노를 젓는 사공의 모습도 보인다. 작가는 평범한 소도시 아니에르에서 노동의 일상과 한가로운 여가가 뒤섞인, 일과 휴식이 뒤죽박죽 혼재하게 되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세기 말의 작품에서 흔히 등장하는 한껏 치장한 부르주아 계층이 아닌, 전형적으로 소박한 모습의 서민들이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즐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멍하니 강변에서 휴식을 취하는 점도 노동과 휴식이 맞닿아 있다는 사실에 무게를 더한다.

그림 한가운데에 등장하는, 유난히 구부정하게 등이 굽은 청년이 눈에 띈다. 그의 지난 한 주는 많이 힘들었을까. 그의 내일은 또 많이 고될까. 그에게 재미는 무엇이고 꿈은 무엇일까. 과연 그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거의 140년 전에 프랑스에서 그려진 여름 휴일의 모습이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갑자기 찾아온 한가함을 대할 때 먼저 한숨부터 돌리고 보는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결국 쇠라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잘 쉬어야 다시 일할 기운이 생긴다는 이야기, 혹은 휴식은 열심히 일한 자의 권리라는 메시지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마스크를 쓰고).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도, 꿈에 그리던 그림 같은 그곳이 아니라도, 하다못해 집 앞 공원이라도. 작가 김영하의 말대로 "여행은 일상의 부재"이니, 아주 잠깐 몸을 식힐 수 있고 한숨을 돌릴 수만 있다면 바로 그곳이 나만의 휴양지가 될 테고, 그곳에서 좋은 기운을 얻어야 또다시 숨 가쁜 일상을 지속할 힘이 날 것이다.

[이지현 OCI 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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