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국장 김순호 과거..'노동운동→대공분실 경찰' 180도 변신

곽진산 2022. 8. 5. 20:1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찰국 설치 논란]성균관대 동문들 "노동운동 하다 1989년 사라져
그 뒤 인노회 활동가들 구속..경찰 특채과정 의문"
인노회 활동 하다 1989년 대공특채로 경찰 첫발
김 "운동권에 회의..동료들 수사엔 영향 안 끼쳐"
김순호 행정안전부 경찰국장. 경찰청 제공

행정안전부 경찰국 초대 국장으로 임명된 김순호 치안감의 대학 동문들이 1989년 후반 노동운동을 같이하던 김 치안감이 ‘대공 특채’로 경찰이 된 것에 대해 “채용과정이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동문들은 조만간 김 치안감의 행적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경찰국장 사퇴를 촉구하는 입장을 밝힐 계획이다.

김 치안감의 성균관대 81학번 동문들은 “1989년 4월 김순호가 돌연 사라졌는데 그 뒤로 인노회 활동을 하던 이들이 구속됐고 그는 경찰이 돼 있었다”고 5일 주장했다.

<한겨레>는 지난달 29일 김순호 치안감이 경찰국장으로 임명된 뒤 그와 1988~1989년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 활동을 같이했던 성대 동문들과 당시 사정을 아는 전·현직 경찰관 등을 접촉했다.

동문들은 김 치안감을 인노회의 핵심 활동가로 기억했다. 김 치안감은 인노회 활동을 하면서 가명으로 ‘김봉진’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당시 노동현장에 취업해서 노조를 결성하는 대학생들 가운데 하나였다.

인노회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의 또 다른 갈래로 1988년 2월에 만들어졌다. 그러다 이듬해 1989년 1월부터 관련자들이 경찰의 수사를 받아 구속되기 시작했고, 주요 활동자들이 같은 해 6월에 재판에 넘겨지면서 조직이 사실상 해체됐다. 안재환 인노회 회장은 6월에 구속됐다.

김 치안감은 1989년 8월 보안특채로 경찰관이 됐는데 당시엔 노조 활동을 하다가 대공분실에 끌려온 이들을 관리하는 ‘대공특채’로 불렸다. 1990년에 경찰 생활을 시작한 서울의 한 간부급 경찰관은 “89~90년대에 특채로 들어온 이들은 대공분실업무를 담당했다. (김 국장은) 총경이 되기 전까지 안보 관련 업무만 담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성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김 국장은 지난 1989년 8월 경찰공무원임용령에 따라 ‘대공공작업무와 관련 있는 자’로 분류돼 ‘대공특채’로 치안본부 대공 3과 소속으로 경찰에 첫발을 들인 것으로 나타난다.

동문들은 김 치안감이 같이 활동을 하다 돌연 사라지고 경찰이 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인노회 활동가들이 경찰에 잡혀갔다며 김 치안감의 행적에 의혹을 보내고 있다.

김 치안감과 인노회 활동을 같이했던 박경식(59)씨는 “김순호는 1989년 4월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때부터 인노회 활동하던 사람들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가 경찰 특채였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이 당시의 정황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인노회 소속이자 같은 학교 선배인 ㄱ씨는 “구속되기 전에 김순호의 지인이 ‘김순호가 사라졌고,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시점이 1989년 6월 전이었다”고 밝혔다.

인노회 활동을 하며 김 치안감과 가장 친했던 사이였다고 주장한 ㄴ씨(59)도 “인노회 관련해 경찰의 조사를 받았을 때 지회장이었던 순호와 개인적으로 나눴던 얘기까지 경찰이 알고 있었다. 경찰의 수사력이 엄청나다고만 생각했다. 당시 순호가 잠적했지만, (행적에 대해서) 의심하지는 않았다”면서 “그런데 그해 8월에 경찰 특채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선 수상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퇴직 경찰관(경찰대1기)은 “대공 수사를 담당하던 이들이 ‘김순호를 전향시켜서 업무에 많은 도움이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김 치안감의 동문들은 행정안전부가 경찰국장에 김 치안감을 앉힌 것이 역설적이라고 씁쓸해했다. 행안부 경찰국이 ‘31년 전 내무부 치안본부의 부활’이라는 비판이 나왔는데 하필이면 자신들을 저버린 이가 그 자리를 맡은 것에 대해 분노했다. 김 치안감과 노동운동 시절 월세방을 같이 살았다던 김현동(60)씨는 “지금 시기 경찰국 쓰임새가 1980년대의 부활이라고 비판하지 않나. 순호가 처음 경찰이 됐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도 배신감이 들었지만, 경찰국장 자리까지 수락했다는 건 절망적인 심정이 느껴진다”고 했다. 박경식씨는 “순호는 보안과 경력으로 승진한 뒤 지금 국장 자리까지 도달했다”며 “경찰국 신설 성격과 배경이 김순호 자체로 드러난다”고 했다.

김 치안감의 설명을 듣기 위해 연락했지만 그는 <한겨레>에 문자메시지로 “차차 말씀드리겠다. 골수주사파로 더이상 빠지지 않고 완전한 단절, 이게 팩트다”고 답했다. 김 치안감은 <와이티엔>(YTN)에 “인노회 사건이 터진 지난 1989년 초쯤 북한의 주체사상에 물들어가는 운동권 흐름에 회의를 느껴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후 고시 공부를 하다가 내적 갈등이 심해져 같은해 7월쯤 직접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대공분실을 찾아가 인노회 사건 책임자에게 그동안의 활동을 자백했다. 당시 경찰 책임자가 ‘대공 특채’를 제안하면서 곧바로 경찰의 길을 걷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인노회 동료들이 구속되거나 수사에 영향을 끼칠 진술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곽진산 기자 kjs@hani.co.kr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