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발자국·날아온 비닐봉지마저 작품이 된다

이한나 2022. 8. 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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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수터 국내 첫 개인전
19일까지 청담 글래드스톤
홍수가 작품들 앗아갔지만
빗물·진흙서 아름다움 발견
자연과 자유롭게 협업 이뤄
식물을 연상시키는 색과 형상을 품은 캔버스들이 빨래 널 듯 걸려 있는 비비안 수터 개인전. [사진 제공 = 글래드스톤]
그림이 그 어떤 틀에도 갇히지 않았다.

식물을 연상시키는 색과 형상을 품은 캔버스 천들이 빨래 널 듯 걸려 있다. 앞의 그림에 가려 전체 화면을 볼 수 없는 그림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37점의 서로 다른 그림이 묘하게 조화롭다. 30년여간 남미 과테말라 시골마을에서 독자적인 색면 추상 세계를 쌓아온 스위스계 아르헨티나 작가 비비안 수터(73)가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여는 서울 청담동 글래드스톤 서울 갤러리 내부를 설치예술처럼 둔갑시켰다.

생태주의 작가로 통하는 그는 야외에서 햇빛, 바람, 냄새 등 주변 자연환경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재즈를 즉흥적으로 연주하듯 붓질한다. 밑칠하지 않은 캔버스에 진흙이나 빗물, 반려견의 발자국까지 담는다. 부레풀(fish glue)이나 화산재, 흙 등을 섞어서 붓질한 색감이 독특하다. 심지어 전시장 안쪽에 걸린 한 그림에는 검정 비닐봉지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그림을 그릴 당시 바람이 실어다 준 것이라 작품의 일부로 품었단다.

작가는 "바로 이 순간에 보고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데, 마치 무아지경에 빠져 그리는 것 같다"며 "빛이 변하거나 내가 무언가 밟거나 하면 그제야 현실로 돌아와 내가 그린 것을 보기 시작하곤 한다"고 했다. 그의 작품은 위아래나 왼쪽, 오른쪽 구분도 없다. 가로로 그린 작품도 공간과 구성에 따라 세로로 걸기도 한다. 작품명은 모두 '무제'고 제작연도마저 없다.

이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작가는 왜 낯선 땅에 칩거했을까.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박해를 피해 오스트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피신했던 어머니를 둔 그는 12세 때 스위스로 이주했다. 그는 화가였던 어머니(엘리자베스 와일드)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시작한 그림으로 20대부터 촉망을 받는 작가였다. 하지만 쏟아지는 관심은 큰 압박이 됐고 작업에 집중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결국 스위스를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와 멕시코를 거쳐 1년 내내 봄 날씨라는 과테말라 아티틀란 호수 인근에 정착했다. 작가는 "예술에 집중하고 다른 영향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고립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2005년 과테말라를 강타한 허리케인을 계기로 크게 변화했다. 홍수로 인해 스튜디오에 보관하던 20년간의 작업물이 모두 잠겨버린 것.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졌던 그에게 그림을 말리며 발견한 빗물과 진흙 흔적이 달리 다가왔다. 그 어떤 붓질보다 아름다웠다. 자연과의 협업(collaboration)이 시작된 순간이다. 작가는 진정 자유로워졌다.

밤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서 손전등을 켜고 작업하던 그를 다시 끌어낸 사람은 스위스 쿤스트할레 바젤의 큐레이터 아담 심치크다. 그는 우연히 1981년 '바젤의 젊은 아티스트 6인(6 Young Artists of Basel)' 전시 자료를 발견하고 6인 중 홀로 존재가 묻혔던 수터를 추적했다. 결국 수터는 2011년 '바젤의 젊은 아티스트 6인×2'로 화려한 복귀를 알렸다. 그의 독창적인 작업 세계가 재조명돼 2017년 카셀 도쿠멘타14에 참여했고, 마드리드 소피아미술관과 테이트 리버풀 등 주요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작업은 같은 그림도 어디에 어떤 그림과 함께 배치되느냐에 따라 새롭게 해석된다. 그림이 일부만 드러나게 한 것은 무언가 비밀스러운 분위기로 관객과 소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울 전시를 위해 그의 작품 전담 설치팀 핵심 인력도 뉴욕 본사에서 날아와야 했다. 전시는 오는 19일까지.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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