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삶은 작든 크든 모두 전쟁"..혼란과 격동의 20세기 전반 스페인을 관통하는 작가들[책과 삶]

김종목 기자 2022. 8. 5.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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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작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C)CARLOS RUIZ B.K, 문학동네 제공

천사의 게임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816쪽 | 2만7000원

스페인 작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1964~2020)의 <바람의 그림자> <천국의 수인> <영혼의 미로> 등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은 추리 소설로 여겨진다. 인간 사회와 문학, 종교에 관한 작가의 통찰과 도전적 문제의식이 녹은 점은 간과된다. 4부작 중 2부인 <천사의 게임>은 고백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작가론으로 시작한다.

“작가는 자기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대가로 처음 돈을 받거나 칭찬을 받은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한다. 자기 핏속에서 허영이라는 달콤한 독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한다.(…) 자기보다 오래 살아남을 허름한 종잇조각에 제 이름이 인쇄되는 가장 큰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은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한다. 작가는 그런 순간을 떠올리도록 선고받은 사람이다. 그때부터 이미 패배한 존재이며, 그의 영혼은 이미 값이 매겨지기 때문이다.”

시작은 주인공 다비드 마르틴의 운명에 관한 복선이면서 작가란 존재, 글쓰기에 관한 사폰의 정의다. 문학·언론판의 허상과 허위에 관한 풍자와 비판이 함께 맞물려 들며 소설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소설 속 소설’도 여러 편 등장한다.

페드로 비달은 바르셀로나 신문사 ‘기업의 소리’ 스타 필자이자 마르틴의 스승, 후견인이었다. 소설 창작의 수렁과 고통에 빠진 비달을 위해 마르틴은 몰래 한 문장, 한 장면을 새로 쓰듯 글을 뜯어고친다. 소설 기본 줄거리는 마르틴이 2년 전 비달에게 이야기한 것이었다. 마르틴은 “비달이 마음속에 품고 있었으며 그걸 쓰겠다고 계획했지만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의 허영심, 특히 형편없는 작가의 허영심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비밀리에 글을 교정해 나간다.

마르틴이 알려준 것과 똑같은 <잿더미의 집>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비달의 소설은 “현대문학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을 선사”한다는 호평과 함께 대서특필된다. 서점 진열대를 메운다. 같은 시기 마르틴이 낸 <천국의 계단>은 서점에서 찾기도 힘들었다. “단조로운 문체로 쓴 미숙”하고, “초보자 마르틴은 대가 페드로 비달을 모방하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했다는 혹평을 듣는다.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1914~1980)가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이 문단에서 찬양받고, 2년 뒤에 로맹 가리 이름으로 출간한 <여인의 빛>과 <영혼의 집>이 ‘에밀 아자르 표절’ 의혹까지 받으며 혹평에 시달린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예술가의 삶은 작든 크든 모두 전쟁이야. 자기 자신의 한계와 맞서는 것이 첫 전투지. 네가 원하는 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야심이 있어야 하고, 그런 다음에 재능과 지식이 필요하고, 마지막으로 기회가 와야 해” 같은 예술가론에 “형용사와 부사의 과도한 사용은 변태나 비타민이 부족한 자의 짓거리” 같은 글쓰기 원칙도 서술했다.

사폰은 이 소설에서 국가, 종교, 사회에 대한 여러 비판을 녹인다. 사환에서 기자를 거쳐 소설가가 된 마르틴이 ‘기업의 소리’에 낸 첫 연재소설 <바르셀로나의 미스터리>는 “살인자와 벌레 같은 인간, 위선적인 신자와 광신도, 교조적인 고집불통을 포함해 모든 종류의 바보를 청소”하는 팜파탈이 주인공이다. ‘청소’는 즉 “국가나 신, 언어, 인종, 혹은 그 어떤 쓰레기 같은 것의 이상으로 끔찍하게 만드는 자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필리핀전쟁에서 돌아온 뒤 사회에 부적응하던 마르틴의 아버지를 두고는 “옛 전우들, 그러니까 육체와 영혼이 망가져 돌아왔지만 하느님과 조국의 이름으로 그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자들이 이제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같은 서술로 참전 용사의 전쟁 트라우마를 묘사한다. “우리 사회는 (청년의) 그 비축된 공격성을 이용하는 법을 찾아냈으며. 십대 청년들을 병사 즉 총알받이로 만들어서 이웃 국가를 정복하거나 그들이 공격해올 때 국가를 지키도록 했다”는, 국가폭력과 전쟁 동원의 실상을 담은 대사도 이어진다. 소설 시대 배경은 1917년 시작해 1930년 초 끝난다. 에필로그는 1945년이다. 혼란과 격동의 스페인 시대상을 함축해 반영한 대사로 볼 수 있다.

마르틴은 이크나티우스 B 삼손이라는 필명으로 <저주받은 도시>도 출간한다. 소설이 인기를 얻어가던 어느 날 마르틴은 편지 한 통을 받는다. “인생이란 위대한 희망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당신의 희망을 현실로 만들겠다는 각오가 서면 주저 없이 연락을 달라”는 내용이다. 발신인은 안드레아스 코렐리라는 뤼미에르 출판사의 발행인이었다.

수년 뒤 마르틴은 코렐리의 집요한 요청을 받아들인다. 코렐리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은 뒤 1년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마르틴의 뇌종양도 말끔히 사라진다. 원고료 10만프랑에다 저작권 양도, 저자 권리 포기 등이 조건이었다. 핵심은 “당신(마르틴)의 모든 재능을 한데 모아 일 년 동안 육체와 영혼을 모두 바쳐 당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종교를 만드는 작업”이다.

코렐리가 말하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는” “그것 때문에 타인을 죽이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제안 전후 마르틴이 코렐리와 여러 차례 주고받는 대화에선 이런 문학과 창작에 관한 규정·정의에다 인간 속성과 종교에 관한 사폰의 비판적 통찰과 역사 지식이 이어진다.

“종교는 하나의 문화나 사회를 통제할 믿음과 가치, 규칙의 체계를 만들기 위해 전설과 신화, 혹은 모든 종류의 문학적 형식을 빌려 표현되는 도덕적 규약” “수백 개의 종교적 믿음은 (살인범은 제각기 달랐지만 이야기가 작동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항상 똑같은 탐정소설처럼) 신에 관한 것이건 국민과 인종의 역사나 그 형성에 관한 것이건 여러 신화와 전설은 구성된 방식이 다를 뿐 항상 똑같은 조각으로 이루어진, 서로 차이가 거의 없는 퍼즐들” 같은 대사가 이어진다. ‘조직화된 모든 종교’는 “집단 내의 여자들을 굴복시키고 억압하며 부정하는 것을 중추”로 삼는다.

코렐리 제안을 받아들인 뒤 집필 관련 인물들이 죽어나가며 소설은 미스터리 게임으로 전개된다. 2009년 번역본을 재개정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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