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세요, 내일보다 싸요".. 물가상승률 64%, 아르헨에 무슨 일이

김신영 기자 2022. 8. 5.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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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점포 앞에 '오늘 사세요, 내일보다 쌉니다'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는 모습. 아르헨티나의 지난달 물가상승률은 전년 대비 64%를 기록했다. 정부의 반복되는 '퍼주기' 정책과 무리한 가격 통제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로이터 뉴스1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월급이 들어오면 마트부터 달려갑니다. 한 달치 생필품을 한꺼번에 사려고요. 모두 ‘오늘이 제일 싼 날’이라는 걸 알거든요.”

지난달부터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강정석씨는 5일 통화에서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니 월급날이면 생수, 화장지 등 생필품 한달치를 한꺼번에 구입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 달 전에 2000페소(약 2만원)였던 라면 다섯 봉지 1팩이 지금은 2500페소로 올랐다고 했다.

코로나 이후 경제활동 재개가 초래한 공급망 문제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겹쳐 미국·유럽 등 세계 주요국 물가가 10%에 육박한 수준으로 급등하고 있지만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이션은 차원이 다르다. 물가상승률이 지난해 6월 50%(전년 대비)를 넘어선 후 줄곧 올라 지난 6월엔 64%(전년 대비)까지 치솟았다. 인플레이션을 막겠다며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지난달 말 기준금리를 연 60%로, 무려 8%포인트 인상했다. ‘자이언트스텝’이라는 미 연방준비제도의 기준금리 인상 폭(0.75%포인트)이 아르헨티나에 비하면 미미해 보일 정도다. 4일엔 직무를 맡은 지 24일된 전임 경제장관이 물러나고 신임 장관(세르지오 마사)이 취임했다. 한 달 사이 경제장관이 두 번 바뀐 것이다. 아르헨티나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현지인들과 전문가들은 반복되는 ‘퍼주기’로 인기를 유지하려는 정부, 이를 위해 필요한 돈을 마구 찍어대는 중앙은행, 경제 체질 개선보다는 자리보전에 연연해 반시장적 정책을 남발하는 정치권이 총체적인 경제 시스템의 붕괴를 불러왔다고 진단한다.

◇총선 앞두고 ‘1432품목 가격동결’ 무리수

지난해 10월 아르헨티나 정부는 전방위적인 가격 동결 조치를 발표했다. 치즈, 고양이 사료, 면도 크림 등을 아우르는 1432개 품목에 대해 가격 상한을 설정했다. 지침서가 881쪽에 달할 정도로 세세했다. 총선의 전초전 격인 예비선거에서 여당이 패하자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인기 하락의 원인으로 보고 가격을 억지로 억누르기 위해 ‘손’을 쓴 것이다.

그래픽=이민경

가격 통제는 수요·공급에 의한 가격 형성을 인위적으로 막는 정책으로, 잘 먹히지 않고 부작용을 많이 유발해 주요국은 쓰지 않는다. 아르헨티나의 가격 통제 역시 실패로 끝났다. 잠시 주춤하는 듯하던 물가는 더 상승했다. 아르헨티나 주재원인 하영택씨는 “물건을 파는 업체들이 정부 눈치를 보면서도 가격을 계속 인상하기 때문에 가격 동결 조치가 유지되지는 못했다”며 “물가 상승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페소 가치 하락이기 때문에 가격을 억지로 누르는 데도 한계가 있더라”고 했다.

하영택씨도 살인적인 물가 급등을 피부로 느낀다고 했다. “지난해 6월 주재원 부임 당시 스타벅스 아메리카노가 250페소였지만 이제 580페소로 130%가 올랐습니다. 현지 한국 식당은 보통 1인당 가격을 받는데, 지난해 처음 왔을 때 1인당 2000페소 하던 가격이 4000페소로 2배 수준이 됐고요. 현재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지폐 단위가 2019년에 나온 1000페소짜리인데, 사람들은 농담처럼 2000페소짜리 지폐가 나올 날도 머지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권자에 퍼주고, 재정은 돈 찍어 막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국가가 너무 손을 놓고 있어 물가가 오른다”(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부통령)면서 가격 동결이라는 ‘극약 처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지경으로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한 주체가 바로 정부라고 지목한다.

지난 4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퇴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집회를 하는 모습. 아르헨티나는 올해 초 경제 상황 악화로 국제통화기금(IMF)에 부채 조정을 합의하면서 긴축을 약속했는데, 이들은 이런 긴축이 보조금 삭감과 복지 축소로 이어질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아르헨티나의 현 정권은 ‘페로니즘’의 계승자를 자처한다. 후안 페론 전 대통령의 이름을 딴 페로니즘은 광범위한 무상 복지, 정부가 주도하는 계획 경제, 자국 우선주의 등을 아우르는 아르헨티나 특유의 정치·경제 체제다. 약자를 위한 계획된 분배라는 원래 취지는 진작에 퇴색했고, 최근엔 무분별한 ‘퍼주기’를 중심으로 한 포퓰리즘(인기 영합주의)을 뜻하는 단어로 주로 쓰인다.

2019년 집권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실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부통령(전 대통령) 역시 비슷한 길을 따르고 있다. 총선 등 굵직한 선거가 있을 때마다 각종 보조금과 복지를 늘리는 한편 세금을 낮췄다. 선거 때마다 반복된 세금 인하로 아르헨티나는 소득세를 내는 사람이 근로자의 15%밖에 되지 않는다.

세수가 쪼그라드는 가운데 코로나 대응 등으로 지출이 늘자 아르헨티나의 재정 적자는 지난해 국내총생산의 3%, 올해는 4.5%가 예상될 정도로 매년 불어나고 있다. 구멍 난 재정을 막기 위한 아르헨티나 정부의 해법은 ‘돈 찍어내기’였다. 지난해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재정 적자를 막기 위해 찍어낸 돈이 GDP의 3.7%에 달한다. GDP가 2000조원 정도 되는 한국으로 치면, 한국은행이 약 74조원을 새로 찍어 재정 적자를 메운 셈이 된다.

그래픽=이민경

◇환율 급등 막는다며 수입 제한 “인플레이션만 악화”

막대한 돈이 풀리면서 아르헨티나 통화 가치가 급락했고 인플레이션은 더 악화됐다. 환율도 급등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정해 놓은 달러 대비 페소 환율은 125페소이지만, 암시장에선 달러가 250페소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강정석씨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돈이 생기면 이를 은행에 입금하지 않고 달러로 바꿔 집에 보관한다”고 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달러 유출을 막겠다며 지난 6월 시행한 수입 제한 조치도 인플레이션에 기름을 부었다. 이 조치에 따라 아르헨티나의 제조업 회사들은 중앙은행의 승인을 받아야만 부품 등을 수입할 수 있다. 수입이 제한되자 시장 전반에 공급이 줄어 인플레이션은 더 악화됐다. 달러 유출을 막겠다는 단순한 논리로 시행된 이 정책은 그러나 또 하나의 ‘악수(惡手)’가 된 것이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레안드로 김씨는 “페소화 가치가 너무 빨리 떨어지기 때문에 상점에 물건이 있는데도 가격 책정이 안 돼서 팔지 못하는 경우까지 생기고 있다”라고 했다. “현재 아르헨티나의 임금 인상률이 연 60%쯤 되지만 물가가 더 빨리 올라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상황이다. 곧 인플레이션이 80%는 될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2년마다 열리는 선거, 포퓰리즘 정책 남발

아르헨티나는 1983년 민주화에 성공했다. 민주화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지나치게 잦은 선거, 그리고 선거 때마다 각 정당이 남발하는 포퓰리즘적 정책으로 재정이 거덜 난 상황이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선거는 4년, 의원 선거는 2년마다 치러진다. 정치권은 한 해 걸러 한 번씩 반복되는 선거를 전후해 포퓰리즘 정책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유권자들은 ‘퍼주기’ 정책에 더 많은 표를 주었고, 그 결과 지난 38년 동안 25년을 페로니즘 정권이 집권했다. 결과는 재정 파탄이었다.

물가 상승이 지속되는 가운데 지난달 28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시위대가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한 기본소득 및 보조금 인상을 요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이날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60%로 8% 포인트 인상했다. /AFP 연합뉴스

2000년대 들어서만 세 차례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한 아르헨티나는 올해 초 IMF(국제통화기금)와 부채 조정안에 합의하면서 ‘돈 찍기’를 자제하고, 각종 보조금을 크게 줄이고, 재정 적자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정치권의 속성을 볼 때 이 약속이 지켜질 가능성은 작다고 보는 전망이 대세다. 아르헨티나는 2018년 IMF로부터 570억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았을 때도 비슷한 합의를 했지만, 표를 노린 정치권의 포퓰리즘 공약이 선거 때마다 반복되며 약속은 무시됐다. 이미 부에노스아이레스엔 이 합의를 반대하는 시위대가 집회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여당이 패하자 페르난데스 부통령은 홈페이지에 “(현재 야당인) 이전 정부가 시행한 정부 지출 삭감 탓에 우리가 졌다”라고 썼다. 이를 내년 대선을 겨냥한 ‘돈 풀기’ 예고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페데리코 스투르제네거 전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는 이코노미스트에 “아르헨티나 정부의 경제 정책은 경제적 원칙과는 무관하다. 모두 정치의 논리, 선거에 유리한 메시지를 위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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