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왕은 주몽의 아들인가? (1)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백제 건국 설화에서 온조와 비류의 친부(親父) 혹은 의부(義父)로 등장하는 주몽왕의 실체는 백제의 시조 동명(東明)으로서 고구려 주몽과는 무관하다는 다소 파격적인 필자의 견해를 소개했다.
그러면 고구려본기에서 주몽왕의 죽음과 유리왕의 즉위 관련 기사를 살펴보자.
먼저 유리왕의 또 다른 이름인 '유류(孺留)'는 백제 비류시조 전승에서 보인다.
즉 고구려본기에서 유리왕의 혈연관계에 대한 기술 중에서는 고구려본기 편찬자가 백제 시조 전승에 보이는 내용을 반영하여 기록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사 명장면-155] 백제 건국 설화에서 온조와 비류의 친부(親父) 혹은 의부(義父)로 등장하는 주몽왕의 실체는 백제의 시조 동명(東明)으로서 고구려 주몽과는 무관하다는 다소 파격적인 필자의 견해를 소개했다. 즉 동명은 곧 주몽이라는 후대인의 선입견이 백제의 동명을 고구려의 주몽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주몽과 온조, 비류의 관계는 혈연적으로나 계보상으로나 전혀 무관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우리 고대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역사 내러티브 하나가 사라진 셈이니 필자로서도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다.
백제 건국 설화에서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를 떠나 남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부여에서 유류(孺留)가 남하하여 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건국 설화에서도 유리(類利)가 부여에서 내려와 주몽의 태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류(孺留)와 유리(類利), 이름이 살짝 다르지만 동일한 인물이다. 그러면 이 유리는 주몽의 아들임은 분명할까?
5세기 초 고구려인들은 광개토왕비문(이하 비문) 첫머리에서 건국시조와 초기 왕계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옛적에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중략)… 비류곡 홀본 서쪽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추모)왕이 왕위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하늘이)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딛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고명세자(顧命世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위 문장이 짤막하지만 신중하게 짚어볼 대목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중 "비류곡 홀본 서쪽 산위에 성을 쌓아 도읍했다"는 내용은 143회 이후 흘승골성[오녀산성]을 다루면서 여러 차례 언급한 대목이다. 이번 회에서 관심을 갖는 대목은 추모왕(주몽)의 죽음과 그 뒤를 있는 유류왕(儒留王)이다. 추모왕은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으로 태어난 그 신비한 출생만큼이나 죽음 역시 예사롭지 않다.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딛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한다.
주몽의 뒤를 이어 고명세자인 유류왕이 즉위한다. '고명(顧命)'은 주몽이 죽기 전에 유명(遺命)을 받았다는 뜻이다. 유류왕이 주몽의 정통성을 잇고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유류왕이 추모왕의 뒤를 이은 후계 왕임은 분명하지만, 아들인지 여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유류왕과 대주류왕[대무신왕]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추모왕-유류왕-대주류왕 세 왕으로 이어지는 왕 계보를 밝히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동명성왕) 19년(서기전 19) 여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오니, 왕은 기뻐하고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으니,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고 이름하였다.
○유리명왕(琉璃明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유리(類利)이다. 혹은 유류(孺留)라고도 하였다. 주몽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예씨(禮氏)이다.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주몽왕의 죽음은 비문의 내용과 달리 매우 건조하다. "용의 머리를 딛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표현과는 달리, 그냥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나마 '용산'이라는 지명이 광개토왕비문의 내용이 어느 정도 반영된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이와 달리 이규보가 지은 '동명왕편'에서 인용한 '구삼국사'에서는 좀 더 설화적인 내용을 전하고 있다.
"가을 9월 왕이 하늘로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않았다. 이때 나이가 마흔이었다. 태자(유리왕)가 왕이 남긴 옥채찍을 용산에 장사지냈다."
위 '구삼국사'의 내용에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표현은 비문과 통하고, 용산에 장사지냈다는 기술은 고구려본기와 통한다. 시조 주몽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도 여러 형태로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이 점을 짚어보는 이유는 고구려 건국 설화나 시조 전승이 여러 계통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건국 설화 등을 살펴볼 때 하나의 고정된 내러티브에 얽매이지 않고, 엄격한 태도로 사료를 비판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료 비판의 태도로 위에서 인용한 고구려본기 유리명왕의 왕위 계승 기사를 면밀하게 들여다보자. 먼저 유리왕의 또 다른 이름인 '유류(孺留)'는 백제 비류시조 전승에서 보인다. 아마도 고구려본기 편찬자도 비류시조 전승 계통의 자료를 보고 유류(孺留)라는 이름을 병기했을 것이다.
유리의 어머니가 '예씨(禮氏)'라는 기록 역시 백제 비류시조 전승에서 보인다. 위 동명성왕 19년 4월조 기사에서는 유리의 어머니 성씨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 기사에서도 유리의 어미니가 예씨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즉 유리왕 즉위년조 기사와 서로 다른 자료에 의거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즉 고구려본기에서 유리왕의 혈연관계에 대한 기술 중에서는 고구려본기 편찬자가 백제 시조 전승에 보이는 내용을 반영하여 기록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리가 주몽의 '맏아들'이라는 기록 역시 백제 시조 전승의 온조와 비류라는 두 형제를 의식한 표현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유리가 주몽의 맏아들이라는 기사를 절대시하여 역사 사실로 확정하기보다는 주몽과 유리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타당하다.
그리고 중요한 점이 또 있다. 백제 시조 전승에 보이는 추모(鄒牟), 유류(孺留)라는 이름이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추모왕(鄒牟王), 유류왕(儒留王)과 동일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주몽, 유리(類利)라는 이름을 전하고 있는 고구려본기의 전거자료보다 더 오래된 자료에 의거하여 백제 시조 전승이 구성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고구려와 백제의 시조 전승이 어떻게 구성되고 변화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한 탐구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는 필자도 뚜렷한 답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필자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헌자료도 유물, 유적을 다루는 고고학과 마찬가지로 사료의 편년, 작성 시기의 층위 관계 등을 엄밀하게 따지면서 사료를 비판해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다. 이런 태도와 연구방법을 필자는 문헌고고학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어서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유리왕 관련 전승을 소개하겠다. 독자분들도 익히 알고 있을 테고, 내용도 다소 길지만 새삼 유리왕 전승을 환기하기 위해서 인용하겠다.
전에 주몽은 부여에 있을 때 예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이를 배었는데 주몽이 떠난 뒤에 아이를 낳았으니 이 아이가 유리이다. 유리는 어릴 적에 길거리에서 놀다가 참새를 쏜다는 것이 잘못하여 물을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아비가 없어서 이처럼 고약하구나"라고 하였다.
유리는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 나라에 용납되지 못해서 남쪽 땅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갈 적에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내가 물건을 남겨 두었는데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고 말하시오. 만약 이것을 찾는다면 곧 나의 아들이요'라고 하셨다."
유리는 이 말을 듣고 산골짜기로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피곤하여 돌아왔는데, 어느 날 아침 마루 위에 있을 때 주춧돌 틈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서리가 있었다. 그래서 기둥 밑에서 부러진 칼 한 쪽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함께 떠나 졸본에 이르렀다. 부왕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치자 왕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합쳐 보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도 유리왕 전승을 전하고 있다. 이는 더 장황하지만 서로 다른 사료 계통이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인용하겠다.
유리(類利)가 어렸을 때 기이한 일이라고 한다. 어려서 일삼아 참새를 쏘았는데 한 아낙이 이고 있는 물동이를 쏘아 깨뜨렸다. 아낙이 화를 내며 욕하기를 "아비 없는 놈이 내 물동이를 부수었다"고 하였다. 유리가 크게 부끄러워하며 진흙 탄환을 쏘아 물동이의 구멍을 막으니 본래와 같아졌다.
집에 와 어머니에게 묻기를 "내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어미가 유리가 어리다고 여겨 장난으로 말하기를 "네게는 아버지가 없다"고 하니 유리가 울면서 말했다. "사람에게 아버지가 없다면 무슨 면목으로 남을 대합니까." 드디어는 스스로 목을 찌르려고 하였다.
어미가 크게 놀라 말리며 말했다. "아까 한 말은 놀리느라 한 말이었다. 네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이시다. 부여의 신하 신세를 원망하여 남쪽으로 떠나가 나라를 세웠다. 네가 가서 뵙겠느냐."
유리가 대답하였다. "아버지는 남의 임금인데 아들은 남의 신하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비록 재주는 없지만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어미가 말했다. "네 아버지가 떠나시며 이런 말씀을 남겼다. '내가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일곱 돌 위 소나무에 물건을 감추었다. 이것을 얻어야 내 아들이다'."
유리가 산골짜기로 가 찾다가 못 찾고 지쳐 돌아왔다. 유리는 집 건물 기둥에서 슬픈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그 기둥은 바로 주춧돌 위 소나무였고 일곱 모서리였다. 유리가 스스로 깨달아 말하였다.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라면 일곱 모서리이다. 돌 위의 소나무라면 기둥이다." 일어나 가 보니 기둥에 구멍이 있었고, 부러진 칼 한 도막을 얻고서는 크게 기뻐하였다.
전한 홍가(前漢 鴻嘉) 4년 여름 4월 고구려로 달아나 칼 한 도막을 왕에게 올리니 왕이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 한 도막을 꺼내 서로 맞추어보았다. 피가 나면서 이어져 온전한 칼 한 자루가 되었다.
왕이 유리에게 말하였다. "네가 참으로 나의 아들이라면 무슨 신성한 재주가 있느냐." 유리가 말이 끝나자마자 몸을 날려 솟아올라 창을 타고 햇빛을 가려 신통한 이적을 보이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태자로 삼았다.
위 두 전승은 내용상 매우 비슷하지만, 또한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는 면도 적지 않다. 어떤 점들이 같고 다른지에 대해 독자분들도 직접 따져보기 바란다. 이런 사료 비교가 사료 비판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2022 이효석문학상] 다급하게 걸려온 전화, 격리의 밤이 시작됐다
- [영화 리뷰] 넷플릭스 영화 `카터`, 눈을 뜬 순간부터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액션
- 빛이 바다에 스며드는…아름다운 순간은 평등하다
- 문화재청, `세계최대 고인돌` 훼손 김해시에 법적 조치
- [오늘의 MBN] 벽을 뛰어넘는 화음…뜨거운 감동
- 강경준, 상간남 피소…사랑꾼 이미지 타격 [MK픽] - 스타투데이
- AI가 실시간으로 가격도 바꾼다…아마존·우버 성공 뒤엔 ‘다이내믹 프라이싱’- 매경ECONOMY
- 서예지, 12월 29일 데뷔 11년 만에 첫 단독 팬미팅 개최 [공식] - MK스포츠
- 이찬원, 이태원 참사에 "노래 못해요" 했다가 봉변 당했다 - 스타투데이
- 양희은·양희경 자매, 오늘(4일) 모친상 - 스타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