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앵글로 적나라하게 드러낸 현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아르노 피셔
세계 미술시장에서 가장 비싼 작품을 내놓은 사진가로 첫손 꼽히는 독일 거장 안드레아스 구르스키(67)의 주요 명품들이 올여름 서울에서 전시 중이다. 두려울 정도로 스펙터클한 현대문명의 풍경들을 보통 5m이상씩 되는 초대형 사진틀에 담아 낯설게 내놓는 것으로 유명하다. 주요 작품들 면면만 봐도 눈이 휘둥그레진다. 20층 빌딩 높이를 넘는 노르웨이 여객선의 객실 수백개가 들어찬 모습, 가스 수송선의 황금빛 넘실거리는 대형 탱크 내부, 눈 덮인 라인강변에서 거리두기를 하면서 거니는 수백명의 산책객들, 세계에서 가장 아찔한 오스트리아의 급경사 스키장 언덕, 대형 그래픽 무늬처럼 연출된 평양의 매스게임….
얼핏 살풍경해 보이는 독일 사진이 이토록 색다른 현대미술로 인식되는 배경이 뭘까?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지난 3월부터 진행 중인 구르스키의 국내 첫 대규모 개인전과 6월 중순부터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르노 피셔(1927~2011)의 회고전 ‘동베를린의 사진가’까지 감상하면 이런 물음을 곱씹게 된다. 세계 사진계의 극강이라는 독일 현대사진의 실체와 저력을 대표하는 작가들인 만큼 전시는 뜯어볼 만한 부분들이 널려 있다.
두 전시에서 공통되는 요소는 즉물주의로 집약된다. 차갑고 엄한 눈길로 세상과 사물의 현상 및 단면을 적나라하게 포착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신객관주의로도 일컫는 독일 특유의 즉물적 사진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 뒤인 1920년대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던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아우구스트 잔더, 알베르트 렝거파치, 카를 블로스펠트 등이 이른바 유형학적 사진으로 불리는, 인물과 사물에 대한 관찰자적 시점의 차가운 사진으로 기틀을 닦은 데서 비롯된다. 이를 1980년대 이래 베허학파를 일군 독일 뒤셀도르프 예술학교의 베허 부부 교수가 이어받았다. 베허의 제자들인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루프, 토마스 슈트루스, 칸디다 회퍼 등이 자본주의 시대의 산업시설이나 문화시설, 소비 공간 등을 냉혹한 시선으로 찍은 대작들을 내놓으면서 1990년대 이래 세계 사진계 흐름을 장악했다.
구르스키는 즉물적 사진의 ‘끝판왕’이다. 전시는 가장 미시적인 시선으로 가장 거시적인 풍경을 잡아내는 시각적 연금술을 펼쳐내고 있다. 21세기 가능한 빅데이터 등의 첨단기술로 복잡한 이미지 조각들을 짜깁기해 붙이거나 과거 꿈도 꿀 수 없던 스펙터클한 시각적 조망을 컴퓨터로 스캔·편집하는 디지털 포스트 프로덕션 작업을 통해 서구의 명화처럼 장면을 연출하면서 철저한 객관성을 가장한 조작 사진들을 보여준다. 구르스키의 조작된 객관주의는 냉혹한 부감적 시선이 도드라지기에 가능하다. 작가가 전혀 찍지 않고 수천장의 위성사진들을 짜깁기한 남극 대륙을 비롯해 미국 엘에이(LA) 할인점과 아마존 물류센터, 베트남 나짱 이케아 가구 납품 공장의 세부를 샅샅이 포착한 풍경 등에서 단적으로 느낄 수 있다. 촬영에 올인하지 않고 이미지 작업 프로그램인 포토샵 등을 통해 집적시키고 엮는 방식에 주력해 자본주의 문명사회가 더욱 공고해진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사회 풍경화와 풍속화를 빚어낸다. 신작들은 현대 미술사는 물론 르네상스 바로크 명화들의 구도를 변주하고 합성하면서 ‘미술사적 참조’란 주관적 방법론을 드러냈다는 점이 주목된다.
16세기 브뤼헐 풍속화를 연상시키는 라인강변 눈 덮인 대지를 걷는 수백명 산책객들의 풍경을 합성한 신작은 팬데믹 이후 거리두기를 하며 서로 떨어진 사람들의 고립감이 깃들어있다. 미국의 팝아트 거장 에드루셰이의 시계 그림과 숭고주의 회화의 거장 바넷 뉴먼의 붉은색 회화 앞에서 권태스러운 자세를 취한 독일 정치인들의 합성사진과 진열실 안에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 이미지를 임의로 집어넣고 합성해 작가만의 가상미술관을 꾸린 근작 등에서 보이듯 작가는 이제 사진과 미술의 경계를 넘어 미술사의 간극도 초월하려는 거장의 도저한 욕망을 표출하는 듯하다. 그의 출세작인 1993년작 <파리, 몽파르나스>부터 <99센트>, <시카고 선물거래소>, <평양> 연작 등 1980년대 이후 전시기의 주요 작품들이 대부분 나왔다. 초창기 개념미술에 바탕한 스승 베허 부부의 유형학적 사진에서 영향을 받아 알프스 산록과 라인강변을 찍은 사진부터 점차 사진이 대형화하고 디지털 기법으로 조작된 이미지를 심어 넣는 고도의 페이크기법을 구사한 작품들까지, 미술과 사진의 경계를 오가다 무화시키는 경지까지 진입한 작가적 관점의 변천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작업의 규모나 기법 면에서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베허 부부보다도 선배인 피셔의 시선 또한 기본적으로 즉물주의를 깔고 있다. 성곡미술관 전시는 1950년대 전란·분단의 상처와 냉전의 장막 아래서 원기를 잃고 무표정해진 베를린 시민들의 삶 구석구석에 앵글 들이댄 초창기 작업을 필두로 1989년 독일 통일을 거쳐 2000년대까지 이어진 그의 사진 기록 작업들을 보여준다. 동시대인들의 삶과 표정에 초점을 맞추되 피사체가 된 그들의 움직임과 주변 건축물, 자연 배경과의 관계를 함께 투시하면서 존재에 미친 현실의 무게감과 상호작용 등을 보여준다. 특히 1960~80년대 러시아, 미국, 아프리카 기행을 하면서 찍은 인물 군상과 독일 동베를린에서 찍은 군상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반복되는 근로 일과에 지친 1960년대 중반 러시아 폐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 열차 승무원의 울컥한 표정과 1980년대 미국 뉴욕 거리를 걷는 흑인 중년 여성의 피곤한 얼굴이 스민 도보 풍경은 20년의 시차를 넘어 삶의 획일에 짓눌린 인간의 공통된 뒷모습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건 동독의 공장이나 공항 같은 공공시설 등을 배경으로 일상복 모델들이 등장하는 1960년대 패션사진들이다. 당대 서구를 풍미했던 로버트 프랭크나 윌리엄 클라인 같은 주관적 감성의 패션사진과 언뜻 비슷한 분위기 같지만 세부를 보면 공장과 공항 등 일상의 공간에서 모델의 자태나 표정 등을 지극히 냉정한 시선으로 포착했음을 알 수 있다. 사진비평가인 박상우 서울대 미학과 교수는 “독일은 구르스키와 피셔의 작업의 원류가 된 신객관주의와 모홀리나기로 대표되는 주관주의라는 사진사의 두 가지 큰 흐름이 생성되고 전개된 본 무대였다”면서 “두 대가의 전시는 세계 사진사의 저변에 면면히 흘러온 객관주의적 관점의 진수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아모레퍼시픽미술관·성곡미술관 제공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 “이러다 지지율 10%”…윤 대통령 휴가 중 국민의힘은 부글부글
- 김건희 박사의 학위논문을 다시 읽으며
- 일본, 931원 입금했다…92살 강제동원 피해자에 이런 망발
- 거래 절벽 ‘오래 버티는’ 강남…전문가들 “시세 유지는 착시”
- 폭염·집중호우에…모기, ‘여름 불청객’ 별명 내려놓을까
- 대형병원 간호사의 죽음…‘빅5’에 뇌혈관 수술 의사가 없었던 이유는
- 돼지 새벽이는 세살이 됐다…거의 유일하게
- “공부는 못해도 착할 줄 알았는데” 감당하시겠습니까, 어머니
- ‘김건희 여사’ 주변 의혹 꼬리 무는데…특별감찰관 임명, 왜 미적?
- 우리 공군 4500년 전 피라미드 상공 날았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