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15) 인생삼피(人生三避)

2022. 8. 5.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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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출세해 안하무인으로
정실 두고 여색 탐하던 일출
인생 끝자락 그의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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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대인은 천석꾼 부자지만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게 한이 돼 기생의 머리를 얹어주고 그토록 원하던 늦둥이 아들을 얻었다.

허일출은 옥골(고결한 풍채)에 영리했다. 허 대인의 사랑을 독차지하자 일출은 정실 딸인 누나들을 하녀 부리듯 했다. 다섯살이 돼 서당에 들어갔는데 하나를 배우면 열가지를 깨쳤다. 열살이 됐을 때는 훈장님이 외출하면 회초리를 들고 훈장 행세를 해 학동들이 공포에 휩싸였다.

“네 머릿속엔 오줌이 들었느냐?”

글이 처지는 학동들은 종아리에 피가 났다. 일출이 열다섯에 초시에 붙더니 열여덟에 대과에 급제, 어사화를 꽂고 말을 타고 금의환향하자 고을 사또가 마중 나가 술을 따랐다.

허일출은 임금님 곁을 지키는 승지가 되더니 궁궐을 틀어쥐고 흔들던 노론 편에 붙어 노론 실권자인 오 대감의 사위가 됐다.

새 신부 오은실은 요조숙녀였다. 친정의 위세가 하늘을 찔러도 늘 겸손하게 신랑 허일출을 하늘처럼 여겼다. 아들 둘, 딸 하나를 낳고 웃음꽃이 끊일 줄 몰랐다.

어린 승지가 나이 지긋한 대감들을 함부로 대하며 묘한 쾌감을 얻기 시작했다. 우황·사향·녹용이 들어오고 돈자루가 밀려들고 금은보석이 다락에 쌓였다. 평양감사도 한양에 오면 일출을 찾아와 꿇어앉고 경상감사도 돈 보따리를 싸와 머리를 조아렸다. 선녀 같은 첩을 얻었다. 어떤 때는 궁중 연회를 마치고 유녀를 데리고 집으로 와 사랑방에서 희롱하기도 했다.

오 대감의 딸 오은실이 아파 드러누웠다. 젖무덤이 쪼그라들어 유모를 구해 두살짜리 막내에게 젖을 물리게 했다. 허 승지는 그 유모도 겁탈했다. 백약이 무효, 착한 정실부인인 오은실은 젖도 안 나오는 쪼그라진 젖을 막내에게 물린 채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당파 싸움이 치열하더니 기어코 사화가 피를 튀겨 노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허일출은 승지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천만다행히 사약도 받지 않고 귀양도 가지 않았다. 의금부에서 들이닥쳐 다락 속 금은보화만 압수해갔을 뿐이다.

집 안에 우글거리던 하인과 하녀도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금수저·은수저에 놋 주발까지 훔쳐갔다. 거지꼴이 돼 낙향했다. 화병으로 드러누웠던 아버지 허 대인이 이승을 하직했지만 빈소는 썰렁해 굽실거리던 고향 친구들조차 외면했다.

우선 아이 셋을 키울 일이 막막했다. 강 건너 마을 과부가 후처로 들어왔는데 뺑덕어멈처럼 막돼먹은 여자였다.

술을 마시고 들어와 엉켜서 자고 있는 세 아이를 내려다보면 죽은 오은실이 생각나 발을 뻗치고 울었다.

제 아비 탈상도 하지 않았는데 일출은 저잣거리 기생집을 들락거리고 꼴에 어린 기생 머리까지 올려주자 후처는 후처대로 외당숙인 집사와 눈이 맞아 콩가루 집안이 됐다.

집사가 곳간 열쇠를 찬 후처와 살림을 빼돌리고 허일출은 주색도 모자라 노름에도 손을 대니 집안 살림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 빠지듯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새경을 못 받은 머슴이 관가에 고발하자 기다렸다는 듯 사또가 허일출을 포박해 동헌 마당에 꿇어앉혔다.

그렇게 비참한 세월이 흘러 허일출(許日出)의 흰머리도 늘어 허낙조(虛落照)가 됐다. 이제 몇뙈기 남지 않은 논밭에 늙은 머슴 하나 데리고 농사짓는 신세다.

장날이 되면 콩자루를 손수 메고 고개 넘고 개울 건너 장에 나가 그걸 팔아 부싯돌도 사고 소주도 사고 짚신도 샀다. 기와지붕에 와송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고 대청에 빗물이 떨어져도 손볼 돈이 없다.

탁발 노스님이 찾아왔다. 선친이 살아 계실 때 들러 곡차를 마시며 사랑방에서 주무시고 가던 노스님으로, 일출이란 이름을 지어준 이다.

일출이 따라 올린 소주잔을 연거푸 비운 노스님이 “인생삼피(人生三避)가 있네” 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평생 살아가며 이 세가지를 꼭 피해야 하는데 첫째가 ‘초년출세(初年出世)’ 너무 일찍 출세하고, 둘째가 ‘중년상처(中年喪妻)’ 중년에 조강지처를 잃고, 셋째가 ‘말년빈곤(末年貧困)’ 늙어서 가난한 것일세. 내가 자네 이름을 잘못 지었어.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일출의 닭똥 같은 눈물이 바지를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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