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사회를 철회시킨 시장의 야만, '생명경제'에 있다

최원형 2022. 8. 5.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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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황우석의 줄기세포 연구 관련 사건은 생명까지도 도구화하는 '생명경제'의 위험성에 대응하여 '생명윤리'를 강조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제약·약물 개발 과정의 임상시험이나 정자·난자 거래 및 수태 대리모 거래 등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시장'은 한껏 그 덩치를 키우고 있는 중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난모세포·대리모 시장이 번성한 생명경제의 중추로 꼽히는데, 이는 계약에 명시된 과업을 이행하도록 요구하는 '특정이행'을 법체계적 기반으로 삼아 구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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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노동>의 지은이는 임상시험, 난자·정자 제공, 대리모 등 물질적이며 신체적인 위험을 감수하는 대가로 임금 또는 수당을 받는 것을 ‘임상노동’으로 규정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임상노동
지구적 생명경제 속의 조직 기증자와 피실험대상
멜린다 쿠퍼·캐서린 월드비 지음, 한광희·박진희 옮김 l 갈무리 l 2만3000원

2005년 황우석의 줄기세포 연구 관련 사건은 생명까지도 도구화하는 ‘생명경제’의 위험성에 대응하여 ‘생명윤리’를 강조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제약·약물 개발 과정의 임상시험이나 정자·난자 거래 및 수태 대리모 거래 등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시장’은 한껏 그 덩치를 키우고 있는 중이다. 과연 생명윤리란 개념만으로 ‘바이오주’를 놓고 꿈틀대는 열망과 기대, 그리고 ‘꿀알바’라며 임상시험에 몸을 대는 청년들을 설명해낼 수 있는가.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 사회학과의 두 사회학자 멜린다 쿠퍼와 캐서린 월드비는 2014년에 내놓은 책 <임상노동>에서 자신의 신체를 걸고 위험을 감수하는 대가로 보상을 받는 것을 ‘임상노동’, 곧 노동으로 규정한다. “이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실험적 약물 소비의 체내 경험, 호르몬 변화, 어느 정도의 침습적 생의학 과정, 사정, 조직 추출, 임신으로 구성된다.” 임상노동 규정의 주요 목표는 자본주의의 진행 과정에서 ‘포스트포드주의’가 이끈 거대한 전환의 민낯을 드러내는 데 있다.

전후 복지국가는 포드주의와 케인스주의에 기대어 성립했고, 그 핵심은 공식적 노동으로서 ‘생산’을 맡는 남성적 영역(고용)과 ‘재생산’이라는 여성적이고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 영역(돌봄)을 분리하고 국가가 중심이 되어 이를 수직적으로 통합하는 데 있었다. 20세기 전반부에 도입된 일련의 사회보험 관련 법체제는 이런 수직적 통합의 결과였다. 그러나 지은이는 20세기 중반 포드주의·케인스주의를 해체하기 위해 등장한 포스트포드주의가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무보수 노동으로 수행되던 서비스를 중심으로 노동시장을 새롭게 재구조화해 ‘사적인 것’을 일거리(work)로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기존 경계를 지우는 대신 재생산 영역을 ‘서비스’로 가공해 시장에 내놓도록 한 것이다. 초기 시카고학파 논자들이 대리모 계약의 전면 시행이나 ‘인적자본’ 이론을 주창한 사실은, 임상노동이야말로 외주화, 사회 보호의 철회, 불안정한 노동집단 등 포스트포드주의의 핵심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포스트포드주의는 19세기로의 회귀, 또는 ‘격세유전’이기도 하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난모세포·대리모 시장이 번성한 생명경제의 중추로 꼽히는데, 이는 계약에 명시된 과업을 이행하도록 요구하는 ‘특정이행’을 법체계적 기반으로 삼아 구축되었다. 대리모로 하여금 아이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만드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임상시험의 경우, 위험을 고지했고 당사자도 동의했으면 당사자가 모든 것을 책임지도록 하는 ‘고지된 동의’를 그 핵심으로 삼는다.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나 쓰였던 원시적인 법 원칙들이 포스트포드주의와 함께 되살아난 셈이다.

지은이는 “이윤 창출을 위해 비물질적이고 금전적인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과 혁신의 물질적이며 신체적인 위험을 감수하는 대가로 임금 또는 수당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는 실질적인 차이가 있다”며, 오늘날 생의학적 혁신 경제는 이 같은 “비물질적인 위험 감수자와 신체적인 위험 감수자 사이의 노동 분할”에 기대어 작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임상노동’이란 규정은, 이처럼 생명윤리만으론 포착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환원 불가능한 비대칭성”을 드러내어 준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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