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많은 삶 억울해 썼다" 주름진 세월 펴낸 글꽃

김여진 2022. 8. 5.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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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많은 내인생. 내가 산 세월이 너무 억울해서 글을 쓰고 싶었다."

옥수수 이고 다니느라 정수리 머리가 다빠진 엄마를 떠올리며 "학교 안보낸 것이 서운했는데 글 쓰다보니 엄마 고생한 것이 생각나서 서운함이 조금 사라졌다. 나도 엄마를 닮아서 고생하고 살았나보다"라고 회상한다.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곳도 홍천이다.

감정을 유려하게 표현한 글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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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옥희(홍천)씨 자서전 2쇄
75세 한글 배워 85세에 집필
척박한 강원여성 삶의 한 단면
전쟁 참상·향토사도 녹아 있어
▲ 책에는 용옥희씨가 직접 쓴 문구와 야생화 그림 작품들도 ‘옥희씨 갤러리’로 묶여 실렸다.맞춤법이 틀려도 감성 넘치는 문구들이 미소짓게 한다.


“한많은 내인생. 내가 산 세월이 너무 억울해서 글을 쓰고 싶었다.”

에필로그 속 한 문장이 강렬하다.

초등학교 문턱도 밟지 못한 용옥희 씨. 75세에 처음 글을 배워 85세에 펴낸 자서전 ‘옥희씨 이야기’ 속 문구다. 이 책이 지난 달 2쇄를 찍었다. 책은 척박한 강원도 땅 위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픔으로 점철된 강원여성 근현대사의 단면이기도 하다.

1938년 인제 남면 늠바우 무푸데기라는 골짜기에서막내딸로 태어난 용씨는 어린 시절 학교 대신 더덕과 송이버섯, 고사리를 따며 산을 누볐다.

고향이 격전지인 터라 13살에 겪은 인제지역 6·25의 참상이 생생하다. 옥희 씨는 “군인들이 해코지 한다고 처녀들이 머리도 풀고, 얼굴에 숯검정 같은 것을 묻히고 염병에 걸린 것처럼 보이려고 했다”고 회상한다. 이웃집 중국군들이 비행기 폭격으로 모두 죽고, 다음 해 봄 한꺼번에 묻혔다. 친정가는 길 곳곳에서 죽은 사람 팔 다리도 나왔다고 한다. 중국군이 위세를 떨칠 때 한국군 한명을 부엌 다락에 숨긴 에피소드도 있는데 이렇게 마무리 된다. “살려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좋아하면서 갔는데 안 찾아왔다. 죽어서 못찾아온 것 같기도 하다.”

▲ 책에는 용옥희씨가 직접 쓴 문구와 야생화 그림 작품들도 ‘옥희씨 갤러리’로 묶여 실렸다.맞춤법이 틀려도 감성 넘치는 문구들이 미소짓게 한다.


꽃다운 16살, 옥희씨 가족은 그를 이웃 갑둔리로 보냈다. 이웃에서는 그 집에 딸을 주면 고생한다고 며칠을 설득했지만 친정은 한입이라도 덜어야 했다. 갑둔리에서 환갑까지 살며 나물을 캐고, 누에를 치며 치열하게 살았다. 변변한 직함 하나 없지만 가계를 꾸리고 육아를 온전히 책임진 당시 ‘엄마’들의 고생 연대기다. 자녀를 잃은 슬픔마저 대물림이다.

옥수수 이고 다니느라 정수리 머리가 다빠진 엄마를 떠올리며 “학교 안보낸 것이 서운했는데 글 쓰다보니 엄마 고생한 것이 생각나서 서운함이 조금 사라졌다. 나도 엄마를 닮아서 고생하고 살았나보다”라고 회상한다.

옥희씨는 5남매를 낳아 길렀다. 그전에 낳은 첫딸이 돌 지난 후 죽었고 그 뒤 두 아들도 돌을 지나지 못했다. 5남매의 탯줄은 큰 아들만 남편이 이빨로 끊어줬고, 다른 자녀들은 용씨가 직접 끊었다. 남편에 대한 원망도 숨기지 않는다. “돈도 안벌어오면서 투전해서 돈 물어줘, 남 때려서 돈 물어줘, 술에 취해서 데리러 가면 버티고 서서 집에 안 간다고 애먹이고 아들들은 모른다. 영감이 나를 어떻게 고생시켰는지…”

갑둔리에 군인사격장이 들어오면서 양양으로 이사 한 후에도 그는 공장을 다니고 도토리를 주웠다. 당시를 떠올리며 옥희씨는 새삼 깨닫는다. “돈 안 벌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영감한테 용돈을 받아본 적은 없다”고.

폐암으로 남편이 먼저 떠난 뒤 옥희 씨는 홍천으로 다시 이사했다. 이 때 모든 물건을 버렸다. 환경운동하는 막내아들이 쓸만한 것까지 왜 버리냐고 타박해도 숟가락 하나까지 새로 샀다. 마음에 드는 커피잔과 물컵을 처음 살 수 있었다. 옥희 씨는 “영감 죽고나서 내가 하고 싶은 것 처음으로 해봤다. 남들은 영감 가고 나면 허전하다는데 나는 편하고 좋기만 하다. 영감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고 썼다.

▲ 옥희씨 이야기 용옥희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곳도 홍천이다. 공공근로 첫 날, 성 ‘용’자 하나 겨우 쓰고 1년을 일하러 다닌 후에야 글을 익혔다. 이후 어린시절 기억과 일상의 순간을 살려 나갔다.

막국수, 옥수수엿, 밀가루범 벅(투새기), 칡떡(칡반대기) 등 먹을 것 부족하던 시전 직접 만든 음식 이야기가 정겹다. 지역 향토사도 녹아있다. 도토리깍지로 하던 통굽놀이(소꿉놀이), 사위달기(사위가 쉽게 산소를 내려가지 못하게 밧줄로 묶는 풍습) 등이 생소하면서도 흥미롭다.

문장들은 단순하다. 감정을 유려하게 표현한 글도 아니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시간이 공기를 압축하듯 납작하게, 그래서 더 진하게 그려진다.눈물마저 메말랐던 주름진 세월이 책 속 꽃잎으로 남았다. 김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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