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원가 공개, 그 달콤한 유혹

채수환 2022. 8. 5.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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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분양·대출금리 놓고
원가공개 압박수위 높아져
서민 고통 심각하다고 해서
시장경제 원칙 훼손은 안돼
다급할수록 기본을 지켜야
서울시 산하 주택도시공사(SH)가 최근 공공 아파트 분양원가를 공개했다. 고덕 강일, 구로 항동, 송파 오금, 강남 세곡에 이어 강서 마곡까지 총 5개 지구 건설원가가 단지별로 땅값, 건물값, 인건비, 조성비, 분양수익의 항목으로 언론을 통해 낱낱이 공개됐다. 분양원가를 전격 공개해 소비자 권익과 서민들의 주거 안정을 지원하겠다는 '용기 있는' 시도다. 동시에 민간 건설사에도 자극을 줘서 분양가 인하를 유도하겠다는 '전략적인' 시도다.

그런데도 당초 기대와 달리 시장과 소비자들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전국 단위로 공공주택사업을 전개하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도 원가 공개에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고법은 LH 아파트의 분양원가를 공개하라는 시민단체의 항소심에 대해 지난주 '각하 판결'을 내렸다. 원가 공개 주장에 제동을 걸며 LH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건자재 값이 급등해 주택 공급이 차질을 빚자 새 정부는 한술 더 떠 분양가 인상 정책을 내놨다. 서울시와 사법부, 새 정부의 정책에 일종의 엇박자가 난 셈이다. 그러다 보니 SH 공사의 용기 있고 전략적인 시도는 찻잔 속의 태풍에 머물고 말았다.

최근엔 금융권의 대출금리 원가를 공개하자는 시도도 등장했다. 더불어민주당 노웅래·박주민 의원은 시중은행의 대출 이자율 산정 방식과 목표이익률 등 가산금리 원가 공개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금융위원회도 은행별로 예대금리차를 비교해 이를 매달 의무적으로 공시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시중은행들은 "사실상 대출금리 원가를 공개하라는 발상이며 과도한 시장 개입"이라는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과거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당시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내가 원래 회계사 출신"이라며 기름값 원가를 직접 계산해보겠다고 정유회사를 압박했다. 우리나라 기름값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에 비해 과도하게 높은 것은 정유회사들이 폭리 마진을 취하기 때문이라는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들도 정유사들이 기름값을 국제유가에 비해 더 올리거나 덜 내려 폭리를 취했다며 과점 체제를 깨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정부와 시민단체의 협공에도 불구하고 정유사들이 폭리를 취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찾아내지 못했다.

요즘 글로벌 물가 폭등으로 국내 시장도 거의 모든 물가가 줄줄이 치솟고 있다. 초인플레이션 시대 서민들의 고통이 가중될수록 정책 당국자나 시민단체는 '원가 공개' 시도에 더 큰 유혹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품질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재화를 구입하는 소비자들의 몫이고 적정 가격은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정부는 가격 담합을 엄벌하고 시민단체는 소비자 고발 기능을 앞세워 피해구제에 나서면 된다. 상품 가격을 인위적으로 짓누르기 시작하면 나중에 둑이 한꺼번에 터지는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서 원가 계산과 대중 공개가 필요하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형평성 논란이라는 또 다른 이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아파트와 기름만 생활필수품이 아니라 자동차나 휴대폰도 생활필수품이다. 은행권 대출금리만 서민 생활에 직격탄을 날리는 게 아니라 길거리에서 파는 김밥이나 소주도 서민 물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상품의 가격을 전부 다 제조원가에 맞추라고 덤벼든다면? 세상엔 획일적인 상품만 넘쳐나고 제조업자들은 마진을 못 남겨 속속 사업을 접을 것이다. 그래도 자발적으로 가격을 인하하지 않으면? 그다음엔 초과이익을 강제로 환수하자며 한발 더 나아간 목소리들이 나올 것이다. 다급하고 어려운 시기다. 그럴수록 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유시장경제라는 존엄한 가치를 지키려면 특히 그렇다.

[채수환 부동산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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